47. 신립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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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때 왜군 북상 몸던져 맞선 용장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어간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인식하는 전쟁의 이미지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전쟁’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릴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전쟁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을 몰라서일 수도 있고, 반대로 평소에 온갖 전쟁(?)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입시전쟁이니 취업전쟁·출근전쟁 심지어 재테크전쟁이라는 말까지 생겨나 전쟁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을 어찌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전쟁과 비교하겠는가. 아니 아무렇게나 전쟁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 것 자체가 진짜 전쟁의 처참함을 겪은 이들에게는 무례가 될 수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400여 년 전에도 이 땅에 처절한 전쟁이 있었으니 조선·명·왜 사이에 벌어진 7년 전쟁,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이다. 영웅은 난세(亂世)에 나온다는 말처럼 왜란을 치르면서 이순신·권율·원균·김시민·곽재우·조헌·정문부·김덕령·사명당·논개 등 수많은 그 시대의 영웅들이 빛을 발하였다. 그런데 전쟁은 패자도 남긴다. 승자가 영웅이 되어 칭송을 받을 때 패자는 말없이 비난과 책임을 감수해야만 한다. 왜란 때 패장으로 기록된 대표적 인물로 신립 장군이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짚어보자.

신립과 임진왜란 그리고 탄금대 전투

신립(申砬·1546~1592)은 본관이 평산으로 고려를 건국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운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신상이고, 아버지는 생원 신화국(申華國)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로 첨정 윤회정의 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독서보다는 무예를 단련하는 데 관심이 많았고, 과거시험도 무과에 응시하였다. 이로써 줄곧 문신을 배출하여오던 그의 가문이 무신집안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시초가 되었다. 신립을 시작으로 이후 그의 아들 신경진·신경유·신경인, 손자 신준까지 모두 무과에 급제한 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으로 책봉되는 등 그의 가문은 무관(武官)의 명가가 되었다.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조선시대 대대로 무관으로 이름 높은 세 가문이 있는데, 신(申)·구(具·인조반정공신 구인후)·장(張·이괄의 난을 평정한 장만)씨 집안이라 기록할 정도로 명성이 이어진 것이다. 특히 신경진은 무과 출신으로서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유명한데, 이런 경우는 조선왕조 5백 년을 통해 박원종(朴元宗)과 신경진 외에는 없다.

신립은 22세 때 과거에 합격한 뒤 선전관·도총관·경력·진주판관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1583년 함경도 온성부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여진족의 두목 니탕개(尼湯介)가 변방을 침입해 오자 이를 물리쳤고, 나아가 두만강 건너 그들의 소굴까지 소탕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북방의 골칫거리이던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우자 신립은 선조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신립이 한양의 어머니를 만나러 왔을 때 선조는 친히 교외에 나가 마중하였으며, 신립의 옷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 자기의 옷을 벗어 입혀주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선조는 신립과 사돈을 맺을 것을 약속하고 후에 자신의 아들(신성군)과 신립의 맏딸을 혼인시키기도 하였다.

그 뒤 신립은 함경도남병사·평안병사를 역임하고, 한성부판윤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을 맞았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한 왜군에 맞서 부산첨사 정발(鄭撥),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결국 패하였고, 이후 왜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양산~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로 치고 올라왔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순변사 이일(李鎰) 등을 경상도로 보내어 왜적이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삼아 임금이 친히 전송하면서 보검까지 하사하였다.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 등과 함께 급히 충주로 내려갔고, 조선의 임금과 대신, 백성들은 모두 신립이 왜적을 물리칠 것으로 믿었다.

김여물과 충주목사 등은 지형이 험한 조령(鳥嶺, 새재)에 잠복하여 전투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신립은 넓은 벌판에서 기병을 적극 활용한다는 전술을 세우고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휘하는 왜군에 맞서 싸우다 패하고, 달천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묘는 광주시 실촌읍 신대리에 있는데, 종중 묘역에는 신립의 묘 외에 신준(신립의 손자), 신완(신준의 손자), 신완의 부인 초계정씨, 신상하(신완의 아들), 신방(신상하의 아들) 등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신립이 이곳에 묻히게 된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달천강에 투신한 장군의 시신을 병사들이 옮겨왔다고 하기도 하며, 시신을 찾지 못하던 중 달천강 하류에서 옥관자(망건에 다는 장식)를 삼킨 잉어를 잡았는데, 이를 장군의 소지품으로 보고 허장을 치렀다고도 전해진다.

역사와 구전의 사이에서(신립을 위한 변명)

신립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서 기록한 것과,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내용이 판이하게 다르다. 역사에서는 신립을 ‘지략이 없는 패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천험의 요새인 조령을 지키지 않고, 탄금대 벌판에서 배수진을 친 결과 싸움에 패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해야만 한 것도, 백성들이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려야 한 것도,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 것도 결국 신립의 탄금대 전투 패전이 그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본다. 만일 신립이 조령에 진을 쳤다고 치자. 왜군들이 조선군과 부딪치지 않고 조령을 돌아서 한양으로 진격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단지 조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신립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신립에 대한 비난은 당시 위정자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을 신립에게 돌리려는 술책일지도 모른다.

반면 구전설화에서는 신립을 영웅으로 묘사한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는 신립 장군과 원귀에 관한 설화를 요약해 보자. ‘신립 장군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처녀 혼자 있는 집에 묵게 된다. 그 집은 밤마다 귀물(鬼物·닭, 거인, 노비, 도깨비 등으로 등장)이 나타나 집안 식구를 해치는 바람에 처녀만 남은 상태이다. 신립은 그날 밤 귀물로부터 처녀를 구해주고, 홀로 된 처녀는 신립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그러나 신립은 이미 부인이 있는 몸이라며 이를 거절한다. 여인은 집에 불을 지르고 지붕에 올라 죽어서라도 신립을 따르겠다고 한다. 그 뒤 여진·왜구의 침입 때마다 처녀의 원귀는 신립의 꿈에 나타나 싸움에 이기는 방법을 일러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도 원귀는 신립에게 문경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라고 알려주지만 결국 패하고 만다’ 귀물을 물리치는 신립은 분명 지혜와 용기를 갖춘 인물이다. 탄금대 전투 패전의 원인도 신립의 전술 실패가 아니라 원귀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다. 민중들은 마음속에 신립이 영원히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영웅으로서만 자리 잡고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역사에 순응하는 듯하면서 새롭게 역사를 인식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다면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신립이 천연의 요새 새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무모하게 배수진을 쳐서 패배를 자초한 무능한 장군인지 살펴보자. 신립이 배수진을 친 곳은 서쪽으로 달천강, 북쪽으로 남한강에 닿아있고, 동쪽과 남쪽은 갈대가 수북한 늪지로 전투를 수행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일부러 불리한 지형을 택하여 전투를 벌였을까. 가장 큰 이유는 예전에 여진족을 물리쳤던 조선 기병의 위력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군은 보병인데다가 오랜 행군으로 지쳐있을 것이기 때문에 넓은 들판에서 싸우면 조선군(기병)이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당시 조선의 병사들은 정규군이 아니라 급히 모집한 일반 백성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은 이른바 오합지졸이었다. 반면 신립에게는 군사들을 제대로 훈련시켜 자신의 지휘력을 발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는 마당에 산 속에 병력을 배치하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고 신립은 생각하였다. 따라서 배수진을 친 것은 일종의 심리전이라 할 수 있다. 군사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전투력이 배가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무모한 배수진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전술을 구사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것은 신립 장군의 작전 부재가 아니라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던 조선으로서 예견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립이 왜적과의 전투에서 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탄금대 전투 당시의 전황이 당대 제일의 용장으로 평가되는 신립 장군일지라도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결과만으로써 그를 단순히 ‘패장’으로 몰아서는 안 될 일이며, 그의 죽음도 패사(敗死)가 아니라 순국(殉國)이어야 마땅하다. 더 나아가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위기를 맞아 기꺼이 전장으로 달려간 신립 장군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본다. 영웅의 진면목은 반드시 전쟁의 승패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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