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층의 모럴헤저드

조장호 경영학 박사·前 한라대 총장
기자페이지

쌀 직불금 문제로 나라 안이 온통 시끄럽다. 직불금은 논농사를 실제로 짓는 경작농민에게 주는 돈이다. WTO(세계무역기구)의 정책에 따라 수매제도를 폐지하고, 또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대처해서 정부가 차액을 보전해 주기로 한 돈이다.

불과 몇 년 전, 쌀 시장을 개방한다고 했을 때 국내는 물론 홍콩으로 남미로 원정까지 하면서 벌인 농민들의 반대가 얼마나 격렬했던 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직불제는 어떤 의미에서 시장개방에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농민들을 달래려고 도입한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돈을 엉뚱하게도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의 부재지주들이 가로챘고, 올해도 역시 신청자가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불법으로 받아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공무원 등 공직자거나 의사, 변호사 등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며, 바로 이 때문에 정부는 조사를 해 놓고도 그 파장을 염려해서 없었던 일로 덮기로 했다는 얘기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의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방만한 경영으로 엄청난 손실을 내면서도 거액의 성과급을 나누어 갖는 이른바 신의 직장인 공기업들의 행태라든지, 직무상 얻은 정보를 악용해서 큰돈을 챙기는 공직자들이라든지, 정권과의 유착을 위해 엄청난 비자금을 마련하는 졸부들의 이야기가 연일 지면을 장식한다.

심지어는 지금 전 세계를 제2공황의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는 금융대란에 대처하기 위해서 정부가 외환보유고까지 헐어 내놓고 있는 달러를 이때다 하고 사재기 하는 사람들까지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과 정부의 몇 차례 경고성 발언을 미루어보아도 아마 이는 사실일 개연성이 크다.

이들이 누구일까? 자금에 여유가 있는 부유층 사람들에다 환율방어를 구실로 내세운 기업들의 차익을 노린 투기도 있을 것이다. 극히 이기적인 일부의 행태이겠지만 도덕적 허무주의니, 모럴 리스크(도덕적 위기)니 하는 자조적인 개탄들이 전혀 근거 없는 걱정으로 들리지를 않는다.

지도층이 도덕성을 잃으면 사회정의와 질서는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영국을 신사의 나라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1%정도인 지도층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들 지도층의 엄격한 도덕성(노블레스 오블레주)이 그 원천이라는 것이다.

한참 된 이야기지만, 잘나가던 촉망받는 영국의 젊은 국방장관이 희대의 창녀스캔들에 휘말려 의원직도 작위도 모두 내놓은 채 홀연히 정치무대서 사라진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그가 기사작위를 다시 받을 때 신문들은 2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서 거리의 청소부와 각종 불우시설의 자원 봉사자로 일해 온 그를 진정한 신사라고 추켜세웠다. 킬러스캔들의 프로퓨모 자작이다. 이것이 바로 불문율의 나라 영국의 힘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도 지도층의 모럴헤저드에 더 이상 방관하거나 관용을 베풀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지금 터진 직불금 가로채기는 어쩜 일벌백계의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공연히 이를 정쟁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정략적이고 소모적인 공방일랑 걷어치우고, 불법, 부당한 수령자들에게 응분의 벌을 주는 단호한 의지와 노력을 정부가 보여줬으면 한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