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박물관

김혜정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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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의 말에 글을 읽는 데에는 사독서(死讀書)와 활독서(活讀書)가 있고, 병법에는 사법(死法)과 활법(活法)이 있다고 했다. 책을 덮은 뒤 삶과 세상에 글자의 뜻을 살려내는 것이 활독서이고, 책 속의 구절을 읽고 외우나 거기에 얽매여 있음이 사독서이다. 한신(韓信)이 고안한 배수진(背水陣)은 ‘죽을 곳에 둔 뒤에야 살 수 있다’는 병서의 구절에서 응용한 것이고, 이순신이 13척의 군선으로 울돌목의 물살을 이용하여 왜군을 대파한 것은 지리(地利)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활법이라 한다. 그러니 활법은 활독서의 결과이고 사법은 사독서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기만의 비의를 감추고 있으며, 그것이 곧 생명의 원천이다. 조선 백자 접시에는 그것을 밥상에 올리던 사람의 애환이 서려있다. 반들반들하게 닳아버린 벼루에는 거기에 먹을 갈던 사람의 고뇌가, 코가 깨진 석불에는 원래 있던 곳을 떠나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된 내력이 들어있다. 빛바랜 고지도에는 그 시대의 세계관과 그것을 펼쳐보며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던 사람의 동경이 배어있다. 이것들을 빼버리고 나면 유물들이란 한낱 덩어리나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숲속의 공주가 볼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로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잠자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유물들은 숨을 쉬며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올해는 박물관이 처음 개관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간 우리나라의 박물관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수백 개의 박물관이 전국 곳곳에서 다채로운 수집·연구·전시·교육 활동으로 국민들의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귀를 기울여 유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또 영혼을 담아 유물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게 하지 못한다면, 모든 활동은 백화점식 물건 진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박물관의 소임은 죽어있는 물건의 수집과 전시가 아니라, 그 유물의 기억을 일깨우고 생명을 심어 부활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이 되어야 한다. 꿈을 꾼다는 것은 박물관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우리의 박물관은 스스로 꿈꾸고, 나아가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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