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잡는’ 헌병보조원서 의병장으로 변신

(32) 강기동

“의병이란 민군(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義)로써 일어나 조정의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과 싸우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朴殷植)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정의한 의병의 개념이다. 우리 역사에서 의병의 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것은 왜란·호란 때와 대한제국 전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내걸고 적과 싸워 그들을 물리치려는 의병의 활동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구국(救國)의 길이라고 할 것이다.

100여년 전 일제의 마수에서 나라를 지키고자 얼마나 많은 선열들이 피를 흘렸던가.

전국을 아우르는 의병장에서 이름 모를 민초(民草)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뻔한 승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후손에 할 말이 있게 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양주·포천 등지를 무대로 50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의병장 강기동 역시 평범한 민초였다가 시대의 부름을 받고 역사에 등장한 경우이다.

강기동(姜基東)의 본관은 진주이고 본명은 기주(基周)이며,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908년 말에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 오류동(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으로 이사하였는데, 강기동의 아버지가 3~4세 된 강기동의 아들을 데리고 와 사는 동안 의병장 강기동은 변장을 한 채 밤중에 몰래 다녀가곤 하였다. 이밖에 강기동이 대한제국 군대에서 기병(騎兵) 오장(伍長)으로 있었고, 군대해산 후인 1908년 당시 헌병분견소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보일 뿐 그 전까지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여기서 그가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다는 곳도 자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즉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1920년)나 ‘백범일지’(김구, 1929년)에서는 장단 고랑포(高浪浦)라고 서술하고 있는 반면, 일제 자료에는 양주군 고안(高安)으로 되어있다. 아무래도 당시에 양주경찰서장이 상부에 올린 일제 측 보고문서가 시간이 흐른 뒤에 기록한 것보다 신빙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강기동이 근무했던 헌병보조원은 일제가 1908년 6월 시행한 제도로 일본 헌병을 도와 전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의병의 움직임을 정탐하고 토벌하는 게 임무였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강기동은 헌병보조원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09년 1월15일 강기동은 근무 중 헌병분견소에 포로로 잡혀있던 의병 길인식(吉仁植)을 풀어주고, 총 2정, 탄환 300발, 권총 1정, 총검 5정을 가지고 도주하여 창의원수부(倡義元帥部) 중군장으로 활동하던 이은찬(李殷瓚)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이처럼 강기동이 헌병보조원을 하게 된 동기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돌연 의병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김구(金九)는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강기동이 처음에 의병에 참가하였다가 귀순의 형식을 취하여 헌병보조원이 되어 경기지방에서 복무하다가 왜놈들이 의병을 검거하여 수십 명을 총살하려던 순간에 숙직을 틈타 이들을 풀어주고 총기를 탈취한 뒤 의병운동을 펼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기동은 의병투쟁에 투신한 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많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의병진의 활동 양상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한 가지 예로 군자금 조달방법의 전환을 들 수 있다. 즉 당시까지 현지 주민한테서 물자나 현금을 징발하던 방법에서 읍장·면장에게 토지세를 납부하도록 통보하거나 우편물을 탈취하는 방법 등은 강기동의 정보 제공으로 이뤄진 것이다. 그때까지 의병들은 우편물이 단순히 편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방에서 서울에 납부하는 공금을 우편국에서 취급한다는 사실을 강기동의 제보로 알게 되었으며, 이후 이은찬 의병진뿐만 아니라 다른 의병부대의 우편물 습격도 빈번해졌다. 이은찬은 일본 헌병·경찰의 내정을 잘 알고 있는 강기동을 중용하여 의병진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이 무렵 이은찬은 간도(間島)로 넘어가 군대를 양성하고자 계획하던 중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밀정의 모략에 빠져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강기동·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이 의병을 모집하여 분통을 씻고자 각처에 격문을 발송하였고, 강기동은 이은찬의 피체·순국 후 그의 직책이었던 창의원수부 중군장을 계승하여 사용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에 나서게 된다. 강기동 의병진은 대체로 수십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포천·양주·광주·적성·영평·양평·가평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경찰과 전투를 비롯하여 부일배 처단, 의복이나 식량 등 군자금 확보투쟁을 전개하였다. 1909년 10월경 연기우(延基羽) 의병부대가 포천지방으로 이동해 오자 여러 차례 그와 연합하여 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이후 두 의병부대는 때로는 연합하기도 하고, 때로는 분산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당시 강기동 의병부대의 활동에 대해 일제는 “행동이 자못 교묘하고 산병선(散兵線, 병력을 넓게 벌려 싸우는 전투대형)을 펼 줄 알며 퇴각하면서도 질서정확하다”고 평했다.

한편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지 않고는 한국을 병합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1909년 9월부터 호남의병을 겨냥하여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의병의 근거지가 될 만한 마을과 주민을 상대로 사방을 포위한 뒤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면서 닥치는 대로 방화·약탈·폭행·살육을 자행하였다. 2개월간 진행된 ‘토벌작전’으로 수많은 의병이 살해되거나 체포되었다. 무자비하게 호남의병세력을 짓밟은 일제는 여전히 경기지역의 의병활동이 활발한 것에 주목하고 다시 이 지역에 대한 토벌을 시작하였다. 특히 의병장 강기동 체포에 혈안이었다. 1910년 2월 일제는 강기동을 검거하고자 순사 2명, 밀정 여러 명으로 구성된 체포전담반을 조직하여 그의 주 활동무대인 광주·포천·양주지방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변장 등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고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6월에는 1개월 예정으로 하사 1명, 상등병 2명, 보조원 6명으로 조직된 임시파견소를 포천·양주의 네 군데에 설치하고 ‘대수색(大搜索)’에 나섰다. 이 와중에 강기동은 정세를 살피고자 서울에 잠입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순사 2명을 발로 차고 탈출하기도 하였다.

이어 일제는 1910년 8월29일을 기하여 한국을 병합하고, 마지막 항전을 펼치고 있던 경기·황해도 지역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이같은 일제의 탄압에 밀려 경기지역 의병들은 근거지를 강원도나 함경도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앞서 강기동은 더 이상의 국내 투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장차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고자 자금을 모으던 중이었다. 일제가 500원이라는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던 강기동은 안기동(安基東)으로 이름을 바꾸고 망명을 통한 새로운 독립운동을 도모하던 중 1911년 2월 함경도 원산에서 일본 순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서울로 압송된 강기동의 오른쪽 다리에는 한국 국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곧바로 경무총감부에 갇히게 되었는데, 때마침 이곳에는 안명근(安明根)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백범 김구(金九)가 붙들려 왔고, 훗날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金佐鎭)도 항일운동을 하다가 ‘강도죄’로 투옥되어 있었다. 이후 강기동은 용산의 조선군사령부 특별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져 4월17일 일본군 행형장(行刑場)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묘비 뒷면에는 강기동의 생년월일이 1884년 3월5일로 새겨져 있다. 그런데 1908년 자료에 당시 그가 28세라는 기록으로써 환산하면 1880년생이 되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의병장 강기동은 30년 남짓 짧은 생애를 살았다.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도 2년여에 걸친 기간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말 의병전쟁사에서 그 명성이 길이 남을 만큼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의 국가관이나 의병활동에 대한 가치관 등을 살필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태극기를 새겨 넣으면서 항일투쟁을 결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였는가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김명우 경기도도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문학박사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