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지난 3월26일 발생한 비극적인 천안암 침몰사고는 4월29일 합동장례식이 거행됨으로써 일단락은 정리된 듯하다. 물론 희생장병 46명의 유가족과 더불어 온국민의 슬픔과 분노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영원히 우리 모두의 가슴에 묻게 될 것이다. 천안함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특히 작게는 국가의 안보태세에 대한 각성부터 크게는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와 더불어 이번 사태를 통해 순직자(또는 전사자)의 예우나 처우에 대한 몇가지 제도들이 새로 도입됐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제도는 소위 ‘사망통보담당관’의 신설이다. 즉 군 복무자의 전사 또는 순직을 사망통보담당관이 직접 가족을 찾아가 통보하는 제도이다. 사망을 통보하는 사망통보담당관은 ‘정복 차림’으로 사망자의 가정을 찾아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사망 사실을 알리고 위로하게 된다. 기존에는 순직사실을 해당부서에서 전화나 통지서로 가족에게 통보했고, 더구나 지난 3월2일 공군 F-5 전투기 추락으로 순직한 조종사의 사고사를 가족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니 그동안 군복무중 전사자나 순직자는 ‘개죽음’으로 대우를 받은 듯해서 씁쓸함이 남는다.

 

여기서 우리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천안함 순국장병 전원에게 화랑무공훈장 추서, 국가애도기간 선포, 서울광장을 비롯한 전국 39곳의 분향소 설치, 장례일 조기게양과 묵념 등,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런 절차나 형식이 유가족의 가슴의 멍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단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것인가? 아니다. 형식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사망통보담당관이 ‘정복 차림’으로 최대한 예우를 갖추고 “귀하의 자제 분이 조국을 위해 명예롭게 순직(전사)하셨습니다”라고 사망사실을 알리는 것은 단지 예의라는 ‘형식’이 아니라 국가가 그 죽음에 대해 깊은 애도와 최대한의 존경을 표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성장과 발전이라는 모토를 위해 많은 형식을 포기해 왔다. 모든 사안 결정의 가장 핵심적인 지표는 경제성, 즉 효과성과 효율성이었다. 그러다보니 형식이라는 부분은 거추장스럽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단지 겉치레로 치부되면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무시되고 과소평가 됐다. 물론 형식주의의 병폐를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형식이라고 폄하하고 폐기했던 것들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안타까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삶 자체가 형식일지도 모르다. 흔한 표현으로 폼을 위해 살고 폼을 위해 죽는 것이 우리 삶일 것이다. 그 형식(폼)은 우리에게 긴장감을 갖게 한다. 또한 우리를 다그친다. 그 형식을 유지하려는 긴장감을 통해 내용이 채워진다. 아니 내용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형식은 그 자체로서 이미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인지 얼마 전 TV에서 ‘챈스 일병의 귀환’이라는 영화가 상영됐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한 군인에게 국가가, 그리고 국민들이 최대한의 예의(형식)를 표함으로써 그 죽음의 가치와 더 나아가 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사회적 통합(내용)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천안함 사태와 맞물려 영화가 주는 감동도 있었지만, 내용은 형식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형식은 형식 그 이상인 것이다.  /최순종 경기대 청소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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