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바다 밑에 고려청자

한반도의 서해바다 밑에는 수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선박들이 침몰해 가라 앉아 있다. 그 후 수백, 수천년이 지나는 동안 침몰선과 그 안에 실었던 문물들은 갯벌과 같은 침전물에 덮히면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20세기 후기부터 서해안 연접지역에 대규모 해안선 개발이 시작되며 해류와 해수면에 변화가 오면서 차츰 바다 밑 환경이 바뀌고, 오랜 동안 침전물 퇴적 밑에 묻혔던 선박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공할 규모의 인공시설물이 연안 바다의 환경을 바꾸고, 이어 물길의 흐름이 바뀌면서 바다 밑 지형을 조금씩 변화시킨 결과였다. 물론 여기에는 해저탐사를 위한 과학적 장비의 개발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적극적 의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난파선들은 특정 기간에 특정한 문물(文物)을 싣고 목적지를 향하다 침몰했다. 이 배에서 얻을 수 있는 문물 정보는 천 권의 책보다, 만 명의 증언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직 우리가 그 안에 담긴 암호화된 정보를 해독할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1983년 완도 앞바다에 침몰한 완도선에는 해남 진산리 청자가마에서 만든 삼 만 여점의 청자를 싣고 있었다. 이어 군산 비안도와 십이동파도 앞바다 침몰선, 무안 도리포와 원산도 해안과 태안 대섬과 마도 침몰선 등에서 수천 수만여점의 고려청자가 발견되면서, 서해 바다 밑은 마치 고려시대로부터 오늘 우리 후손에게 보내주는 청자 유산의 보따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잠시 생각을 바꿔보면, 왜 수도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서남해안지방에서 무겁고 깨지기 쉬운 청자를 만들고, 수많은 위험을 감수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조선시대 백자는 한양과 가깝고 연료가 풍부한 경기 광주에서 제작, 운송하여 효율적이었다. 그런데 서남해안 전역에 20여개소가 넘는 청자가마가 존재 했는데, 왜 가까운 청자가마를 제쳐 놓고 가장 먼 강진청자를 선택했을까. 과연 강진청자가 비효율과 위험부담을 감수할 만큼 질감과 색상 등 조형이 아름다웠을까. 

 

/최 건 경기도자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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