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청자를 만들 수 있었던 나라는 중국과 우리 단 둘 뿐이었다. 따라서 비교도 당연히 중국과 우리 두 나라가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청자문화가 정점에 이른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600년간의 양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한반도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와 조선 초기의 기간으로 한민족 중심의 수준 높은 문화를 일정하게 유지해 왔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못했다.
한족(漢族)의 중국은 북방 유목민족과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 속에서 당(唐)에서 오대십국으로, 송(宋)의 통일과 북방 거란의 요(遼)와 여진 금(金), 몽고 원(元) 이후 다시 한족의 명(明)이 통일하는 다난한 역사를 거쳤다. 중국 지배층의 교체와 변화의 과정에서 청자의 조형정신과 표현방식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우리 청자시대 600년은 유약의 투명함을 가장 큰 장점으로 하고 있었다. 엷은 담녹색이나 담청색을 띠는 0.3㎜ 정도 두께의 투명한 유약층은 마치 깊은 산 계곡 맑은 개울물과도 같아서 점토 위에 가는 모래알이 스친 흔적까지 선명하게 나타나게 한다. 유층 안에는 아주 가는 맑은 기포(氣泡)들이 꽉 차고 광택은 은은하다. 또한 점토의 질감은 빛의 난반사를 거치면서 우리 시각(視覺)에 부드럽게 와닿는다. 유리질이 주는 차갑고 날카로운 맛이 고려청자의 장점인 맑고 부드러운 유약의 질감으로 인해 예리함이 완화되고 따뜻한 피부 같은 촉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부드러운 유약의 성질 때문에 섬교하고 우아한 조형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섬교한 장식문양과 회청색 바탕에 흑색·백색 물감을 가는 붓으로 날아갈듯 새겨 넣은 버드나무와 갈대는 계곡의 맑은 물 밑으로 보듯 선명하다.
반면 중국은 600년 변화 속에서 드러냄이 아니라 감춤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고려청자가 맑은 계곡 물이라면, 중국청자는 황하의 깊고 탁한 강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 건 경기도자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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