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얄랑셩 얄라리 얄라…” 내 고장 유일한 명산 광교산에 가을이 왔다. 문암골 계곡 타고 지나가며 잔잔한 물소리에 나직하게 메아리쳐 오는 소리, 청산별곡 뒤섞어서 목청 돋우어 멋들어지게 창부타령 가락에 맞춰 흐드러지게 한 곡조 뽑아도 좋으리라. 광교저수지 수변로를 따라 걸어가면 넉넉하게 솟아 있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눈물겨운 형제봉이 바라다보이고, 어느덧 내 마음은 차분하게 저수지 끝 조그마한 다리를 지나 정자에 걸터앉아 반가운 친구들과 정담을 나눈다.
이처럼 가을이 오면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난 아들 설총의 선문답이 압권이다. 설총은 성장한 뒤 태어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비 없이 자라온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어느 가을날 원효대사를 찾아간다. 자신의 아들 설총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고 원효대사는 설총에게 빗자루를 건네주며 “우선 이 마당의 낙엽들을 쓸거라”라고 말한다. 설총이 커다란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나니 원효대사는 마당에 나와 쓸어서 수북이 쌓아 놓은 낙엽더미에서 낙엽을 한 움큼 쥐어 마당을 거닐며 낙엽을 뿌리고 난 후 “가을날의 마당에는 군데군데 낙엽이 떨어져 있어야 더욱 어울리는 법이노라”라고 말한 뒤 말 없이 절 안으로 되돌아갔고, 설총은 그러한 그의 뒷모습을 향해 큰절을 하염없이 드렸다는 얘기다. 한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을날 낙엽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깨끗한 마당같이 살다 갈 수 없다는 원효의 현답인 것이다.
광교산의 가을밤은 물론 산등성이에서 제일 먼저 오지만, 확실한 밤은 등산객들이 썰물처럼 물러간 버스 종점에서부터 밀려온다. 어둠이 어둑어둑 밀려오는 산등성이를 보면, 광교산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 두 세계를 반씩 영위하며, 이곳을 사랑하며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가슴 저린 번민과 슬픔 대신에 숭고한 정적과 수많은 사연 섞인 소리들을 포옹해버리는 무한한 침묵의 엄숙한 모습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가와 내 귓가에 나직이 속삭인다. “산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란 이 세상에는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다는 철칙인 것이다.”
이재복 수원대 미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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