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이 시대 괴물은 인간과 공존 누구나 보이지 않는 괴물과 사투

이 시대에는 괴물이 매력 있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괴물이 인간을 향해 가장 잔인한 형태로 보복하고 한바탕 복수극을 치르는 공포영화는 상당한 인기가 있어 얼마 전 영화 ‘괴물’에 대단한 관심을 보여준 바 있다.

 

시인 남진우는 ‘공포 영화와 함께 이밤을’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대형 화면 가득 산송장이 넘실거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저 괴물의 계보학/ 화면은 순식간에 피로 물든다 …’ (중략)

 

이 시가 나타내고 있는 ‘괴물’은 인간들의 억압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을 괴물로 변형해 출현시킨 상징물이다. 사람들은 피로 물든 화면을 바라보면서 실재가 지워진 가상으로 화한 이미지의 재현을 즐긴다.

 

어떤 성화를 위장한, 폭력적인 생명을 가장한 죽음의 행위를 오락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가학성과 피학성이 겹치는 괴물과 인간과의 관계 속 심연은 생명과 죽음의 이중 의미를 지닌다.

 

괴물이란 신화의 말을 빌리면 부자연한 체구 및 부분을 가진 생물을 말하며, 보통 굉장한 힘과 잔인성을 가진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생물체이다.

 

예를 들면 스핑크스와 키마이라를 들 수 있다. 야수의 무서운 성질과 인간의 지혜와 재능을 겸비한 자다. 신화에서는 자주 신이나 영웅에 대적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핑크스는 테바이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괴물로서 사자의 몸뚱이에 상반신은 여자였다. 이 괴물은 어려운 질문을 인간에게 던진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간을 죽여 버린다.

 

어느 날 스핑크스는 한 농부에게 질문을 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선한 농부 오이디프스는 “그것은 인간이다”라고 대답했다.

 

스핑크스는 자기가 제출한 수수께끼가 너무 쉽게 풀린 데 굴욕을 느끼고 바위 밑으로 몸을 던져 죽어 버렸다. 인간이 괴물을 이긴 신화의 한 스토리다.

 

신화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도 괴물이 자주 출몰한다. 사람의 몸에 야수의 사상이나 생각을 가진 기형의 생물체라든지, 행복한 얼굴을 가진 인간이 무서운 방향으로 다가가면서 공포의 쾌감을 즐기는 것 등은 분명 괴물의 모습이며 괴물의 행위를 닮고 있는 것이다.

 

괴물은 그 몸이나 생각, 힘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렵다. 다리에서 목까지는 인간의 것이지만 머리는 줄창 짐승이나 마귀의 생각만 하고 있다면 괴물임에 틀림없다. 한강과 그 주변 둔치를 타고 올라와 히스테리컬하게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

 

괴물은 잔인해 보이지만 가끔 심술도 부리고 엄살을 떨면서 친밀하고 약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괴물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감당하기 힘든 식욕과 탐욕이다. 통째로 먹이를 삼키기도 하고 자신의 은신처에 먹이를 저장해 놓기도 한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은 이 영화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러한 괴물과 맞서 싸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절하고 외로운 사투를 벌인다.

 

인간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 이 시대의 괴물은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모습보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접근해 오고 있다. 가끔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 또는 근사한 선물을 가지고 오기도 한다.

 

사람이지만 괴물이 하는 짓을 아무 거리낌없이 해버리는 이 시대의 괴물은 영화 속이 아니라 지금도 인간과 공존하며 분명 삶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괴물’을 즐기는 것은 어쩌면 내면의 억압된 상처에 대한 자각증상이며 검은 네트워크의 심적 정황이 유발된 심리적 상태일 수도 있다. 가장 위험하고 심각한 문제는 ‘괴물’이 현대인의 끔찍한 보복성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 문 자 협성대 총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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