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의 길을 묻다

<38> 임진강 굽이굽이 황희정승 그립다

老정승이 사랑한… 손때묻은 반구정서

 

통일로를 타고 임진강을 바라보며 판문점 쪽으로 길을 달리다 보면 문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타고 돌아 들어가다 보면 반구정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는 차라리 작아서 잘 보이지 않고 ‘반구정 버드나무집’이라는 음식점 간판이 더욱 눈에 잘 들어온다. 이 오른쪽으로 꺾이는 길을 타고 들어가면 임진강이 곁에 흐르는 넓은 마당이 나온다. 왼쪽으로는 황희 영당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 바로 문산읍 사목리로 황희 선생이 만년에 갈매기를 벗삼아 시를 읊으며 보낸 곳이다. 그 이름하여 반구정(伴鷗亭)이다. 반구정은 임진강가의 기암절벽에 자리잡고 있어 여름이면 임진강이 굽이쳐 흐르고 곁에는 송림이 울창해 예로부터 기러기가 많이 모여들었다 한다. 늙어 은퇴한 정승을 위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동서고금의 역사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경륜을 논하고 더불어 시와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이러한 반구정이 분단의 한 자락이 되어 철책으로 둘러쳐져 있고 초병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로 노정승에 대한 송구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청백리 귀감·덕망있는 정치가 황희

 

조선조 500년 동안 이름난 임금을 들라면 누구나 세종 임금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요, 덕망있는 정치가를 들라면 한결같이 세종 임금을 도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희 정승을 꼽을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정승은 넷 밖에 없다 한다. 이 말은 그 분들의 이름 아래에는 대체로 ‘정승’이란 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황희 정승을 비롯해 맹 정승 맹사성(1359∼1438), 상 정승 상진(1493∼1564), 오리 정승 이원익(1547∼1634)을 가리킨다. 특히 황희는 향년 89세에 별세한 장수한 정승으로, 뛰어난 학문과 치정보다는 훌륭한 인덕으로 인한 처세와 삶의 지혜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황 정승이 얼마나 청백리였는지는 다음의 일화만 보아도 알수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아들 황치신이 정승의 자리에 올라 선물을 가지고 왔다. 그러자 황 정승은, “네 놈이 벌써 재물을 아느냐”하며 즉시 임금께 상소해 아들을 파직시킬 것을 주장했다. 얼마나 곧고 강직한 선비정신이었으면 정승 자리에 있는 자식을 파직시키라고 건의할 수 있을까.

 

개경에서 태어난 황희는 어릴 적 이름이 수로였다. 14세에 음관으로 복안궁 녹사가 됐으며, 21세에 사마시 합격, 27세에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황희는 평생 벼슬과는 인연을 끊고 학문에만 전념키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황희의 지모에 반한 조선 태조가 끈질기게 조정에 나와 나라를 이끌 것을 간청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벼슬길로 나서게 되었다. 이를 보고 지조를 버렸다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없으리라. 비록 그가 두문동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야합에 의한 것이 아님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고 또한 그 결과는 그의 한 평생이 오로지 나라를 위한 삶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초 왕권강화·국정안정 크게 기여

 

조선조에 발을 들여놓은 황희는 태종 때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장자인 양녕대군을 제치고 세째인 충녕대군(후에 세종)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후세에 큰 환란의 씨가 된다며 반대하고, 급기야는 1413년(태종16년) 세자 폐립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성군인 세종은 즉위 4년에 태종의 부탁을 받고 황희를 좌참판에 발탁했다. 이후 계속된 세종의 신임으로 1431년 9월 영의정부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그후 1449년 10월 관직을 떠날 때까지 19년간을 영의정부사로 재임하면서 1432년에는 장리의 자손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서용할 수 있도록 장리자손금고법을 완화시키고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의 천역 면제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수행하였다. 또한 1432년 겨울 여진족이 평안도에 침입해 노략질을 했을 때 여연, 강계 지방의 백성을 위한 구호책을 진언해 조세와 부역을 30년 동안 탕감하고,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관청에서 의복과 식량을 주며 친척으로 하여금 보호해 기르게 하되 친척이 없는 경우에는 살림살이가 넉넉한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구휼토록 하였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당대의 왕권 강화와 국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고, 청렴한 명신으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다. 소학 가예 성리학 등을 즐겨 공부했지만 뚜렷한 학파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그는 학문적 업적보다는 국정을 수행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이 강했다.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6년간을 좌·우의정으로 재직했으며, 19년간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등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특히 1436년 7월 좌의정 최윤덕이 영중추부사로 체직되고 이듬해 10월 우의정 노간이 파직됨으로써 1437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영의정으로 홀로 재직하면서 국정 전반을 처리했다. 관직을 떠난 뒤에 파주의 반구정에서 여생을 보내면서도 국정의 중대사가 있으면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했다.

 

반구정,  86세 벼슬 물러나 세운 정자

 

다시 이야기를 반구정으로 돌려보자. 산 위쪽으로 높게 뻗은 층계를 따라 천천히 올라가면 정자가 우뚝 서 있고 편액이 처마 밑에 걸려 있는데, 이름하여 ‘반구정’ 곧 ‘갈매기와 짝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정자 이름도 멋지거니와 글씨 또한 멋이 넘치는 명필이다. 반구정은 바로 자연에의 동경이 뭉쳐 이뤄진 것이다.

 

“백구야 쩡쩡 날지 마라 / 너 잡을 내 아니다 / 성상이 버리시매 너를 좇아 예 있노라”

 

이 노래는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단가로, 벼슬살이하던 사람들이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생생하게 나타내었다. 물가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흰 갈매기는 자연을 동경하는 선비들의 마음을 가장 신비롭게 사로잡았다.

 

반구정은 갈매기를 벗삼아 놀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도 서울 압구정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세조 때 부귀와 권세를 한 몸에 지녔던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은 그 ‘친할 압’자도 정말로 흰 갈매기와 동무삼아 놀겠다는 뜻이 아니라 갈매기를 길들여서 손아귀에 가지고 놀겠다는 뜻이 암암리에 숨어 있다. 그러나 반구정의 ‘짝 반’자는 진정으로 갈매기와 친한 벗이 되겠다는 취지로 신선한 맛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반구정은 86세 때 벼슬에서 물러난 황희가 세운 정자다. 당시에는 낙하정이라 이름했다. 그러나 황희가 죽은 후에는 없어졌다. 다행히 400년이 지난 뒤에 후손이 다시 세우고 그 뜻을 따서 ‘반구정’ 이라 이름짓고 중요하게 보존했다. 그런데 6 25전쟁 때 불에 타서 또다시 없어졌다. 이것을 1967년 6월 사방 4칸 규모로 중건해 현재에 이른다. 반구정은 단청이 곱고 화려해 정감은 가지만, 마루를 놓지 않고 시멘트 바닥으로 되어 있어 앉아서 갈매기를 쳐다보고 시를 읊기에는 어딘가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 다시 마루를 놓아 반구정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정자 내부에는 근래에 정자를 중수하며 쓴 기와 중건기가 두 편 걸려 있다. 기는 미수 허목이, 중건기는 정유년에 심산 김창숙이, 또 다른 것은 정사년에 윤희구가 썼다. 반구정 밑에는 파란 임진강이 굽이쳐 유유히 흐르는데, 날씨가 좋으면 강 건너 개성의 송악산이 눈앞에 다가선다고 한다.

 

황희 추모, 유림들 지은 6각형 앙지대

 

반구정에서 남쪽으로 바로 이어진 등성이 위쪽에는 또 하나의 정자가 멋들어지게 서 있는데, 그곳까지 층계가 나 있다. 반구정보다 작은 이 정자는 6각형으로서 이름하여 앙지대이다. 이 정자는 1455년(세조 원년) 유림들이 황희 정승의 유덕을 추모해 영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할 때 지은 것이라 한다.

 

‘높은 산을 우러러 받들 듯이 / 넓게 트인 길 우리 따르리’

 

후생들도 이 어른의 높고 넓은 뜻을 본받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영당과 직접 통하는 돌계단이 가파르게 놓여 있는 정자 아래는 늙은 참나무에 에워싸여 시원함과 정취를 자아낸다. 정자 내부에는 1973년 3월에 이은상이 쓴 중건기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후손이 쓴 현판시가 하나 걸려 있다. 정자는 단청도 화려하고 잘 보존돼 있지만, 이곳이 500여년 전에 노정승의 손때가 묻어있는 곳이라 생각하니 더욱 감회가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구정은 왠지 슬프다. 수억년을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이 분단의 상징이어서 그런가. 갈매기처럼 자유롭게 임진강을 건너 남북을 오가는 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김준혁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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