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Metro] 역사와 문화의 고장
조선 태조, 아전·백성 지금의 고읍으로 이주 군으로 지정
근대, 의정부·남양주·도봉·노원·강북·중랑 떨어져 나가
양주의 시초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때로 거슬러 오른다.
B.C 37년. 유럽에서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로 인해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자살하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할 당시,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동명성왕)의 아들 온조가 위례성(서울 북한산)에 백제국을 세웠고 당시 양주는 백제의 중심지역에 위치되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고구려 영토에 포함됐다. 이때 ‘매성군’ 또는 ‘창화군’, ‘마홀’이라고 불렸으며 553년에 신라의 삼국통일로 인해 신라영토에 귀속됐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침에 따라 지금의 양주지역을 래소, 동두천·은현지역을 沙川, 진접·진건지역을 황양, 북한산지역을 한양으로 개칭(757년-경덕왕16년)했다.
하지만 문헌상에 ‘양주(楊州)’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935년, 고려 왕건이 후백제왕인 견훤의 항복을 받고 양주땅을 식읍으로 하사한 뒤부터다. 이후 성종이(983년) 지방제도 정비에 착수하면서 전국을 12목으로 나누고 양주에 목사를 두기 시작했다. 또 문종왕(1067년)때는 양주를 남경이라 하고 유수관(남경漢陽·광주廣州·서경平壤을 다스리는 외관직外官織)을 두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조(1395년)가 고려 때의 불리던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고 기존에 살던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고읍동)로 이주시키고 행정구역명을 양주군으로 칭했다.
태종(1410년)에는 양주목을 도호부로 격하시켰지만 세조(1466년)때 와서 다시 양주목으로 승격시켰다. 중종(1506년)에 와서는 치소를 佛谷山(佛國山)남쪽(유양리)으로 이전했고 고종(1895년)에 와서야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경기도에 속하는 3등군 중의 하나가 됐다.(칙령 제36호 지방제도·관제·봉급·경비개정 제5조)
근대시대로 와서야 1922년 10월 1일 양주군 청사를 유양리에서 시둔면(現의정부시)으로 이전했고 1938년에 시둔면이 양주면으로 개칭했다.
또 1942년에는 양주면이 의정부읍으로 승격한 뒤 1963년에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승격하며 양주시에서 분리됐다. 이와 겹쳐 노해면 9개리(現서울 도봉구·노원구·강북구일원)와 구리면 5개리(現서울 중랑구)가 양주에서 빠져나와 서울시로 편입됐다.
이와 함께 1980년과 1981년에는 지금의 남양주시와 동두천시가 분리되어 지금의 양주시 면적과 행정구역만 남게 됐다.
이처럼 지금까지 양주시가 의정부시와 남양주시, 서울 강북지역 등을 분리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인구의 10분의1에 가까운 458만 명의 시민을 끌어안은 거대 도시로 발전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거 양주군에서 분리된 시(市)의 본가(本家)가 바로 지금의 ‘양주시’ 라는 점이다.
현재 양주시는 310㎢의 면적에 1개의 읍과 4개면, 6개의 동으로 행정구역을 나눠 20여만 명의 시민이 모여 내실 있게 살아가고 있다. 이와 함께 763명의 양주시청 공직자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매력적인 자족도시’건설과 ‘시민과 소통되는 행정’을 펼치기 위해 많은 열정을 쏟아내고 있다.
이처럼 양주시가 가지고 있는 숨은 매력을 찾고 오래된 역사를 배우며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앞으로 무궁무진한 기회를 찾을 것이며 도약과 미래를 준비해 온 공직자와 시민이 한 마음 되는 순간, 2011년 양주시의 봄은 Exciting 한 변화와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양주=이상열기자 sylee@ekgib.com
홍보대사 탤런트 임현식이 말하는 ‘유적·전통문화’
양주관아지
원래 조선시대 목사 정무보던 20칸 한옥
양주시 유양동에 자리잡은 옛 관아터에는 양주목사의 정청이었던 매학당(梅鶴堂)이 있던 곳이다.
매학당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외동헌과 가족이 생활하던 내동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여 칸 규모로 만들어졌다.
관아터 중앙에는 옛 동헌을 복원해 신축하고 한식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에 정면 7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화강암 기단위에 주춧돌을 놓고 방형기둥을 세웠다. 동헌 왼편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양주목사들의 송덕비 18기가 위치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일찍이 듣건대 국초에 양주목사가 부임에 앞서 임금께 하직인사를 드릴 때 대전(大殿)안에서 숙배단자(肅拜單子)를 돌려주었다고 하니, 대저 능침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임금께서 그를 당신 고을의 수령으로 대접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외관직이지만 쟁쟁한 인물들이 당시 양주목사로 부임해 왔을 만큼 중요한 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양주별산대놀이
200년전 싹튼 민초의 항변과 해학 이어져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인 ‘양주별산대놀이’는 ‘애오개(아현동)’, ‘가든물’, ‘사직골’ 등지의 것을 ‘본산대’라 부르는 반면 양주시 유양동에 전승되어 내려온 탈놀음을 ‘별산대’라고 한다.
지금부터 약 200년전 양주사람 이을축이 서울 사직골 딱딱이 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킨 것으로 전해지며 양주 최초의 가면제작자로 통하기도 한다.
4월 초파일과 단오, 추석에 주로 연회되었고 명절이나 기우제 때도 모여 판을 벌였다.
연회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의 공통된 내용으로 남녀 사이의 갈등, 양반에 대한 풍자와 모욕, 서민생활의 빈곤상 등 당시의 시대적배경을 반영한 현실을 폭로하고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산대놀이’하면 바로 ‘양주별산대놀이’로 대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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