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내 고향이 연천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건 만나는 사람에게 고향 얘기를 빼놓지 않는 습관 때문이다. 한때 ‘동막골’이라는 영화가 흥행했을 땐 ‘내가 태어난 동네가 동막리인데 동막골로 불린다’며 영화속 주인공인 양 영화 홍보에 열을 올린 적도 있다. 동막골이 여름이면 계곡물에 발을 담그려는 피서객들로 넘쳐난 데는 이런 나의 고향 사랑이 한몫했을 것이다.
고향 얘길 할 땐 산 좋고 물 좋은 것부터 시작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어디 거기만 그러냐” 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거드는 이가 많다. 데이트 코스로 한탄강을 찾았던 추억이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어서다. 기억속의 한탄강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물놀이를 즐기는 장소이자, 경원선 열차를 타고 하루 나들이 코스로 다녀갈 수 있는 유원지였다. 산업화로 한때 물이 오염돼 행락객들의 발길이 끊긴 적도 있지만 지금은 오토캠핑장과 야영장 등이 잘 갖춰져 주말엔 사전 예약하지 않으면 이용이 어려울 만큼 인기다.
70년대 한탄강은 연인들로 제법 북적였다. 고고학을 전공한 미국 병사 그렉 보웬 역시 데이트를 즐기려 한탄강엘 왔다가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돌맹이 하나가 한탄강이 자리한 전곡이라는 조그만 마을을 세계 지도에 새겨 놓았다.
전곡에서의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발견은 고고학계의 혁명이었다. 대표적인 전기 구석기 유물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프랑스 생 타슐 유적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150만년 전부터 10만년 전까지 사용됐다고 보고되고 있다. 당시만 해도 모비우스의 학설이라고 해서 이런 아슐리안형 석기문화는 유럽과 아프리카에만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그것도 한반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도끼가 발견된 것이다. 철통 같던 모비우스의 가설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새삼 고향 타령을 하는 덴 이유가 있다. 연천군에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건물이 들어섰다. 오는 25일 개관하는 전곡선사박물관이다. 꽤 훌륭한 자랑거리가 생긴 것이다. 비용만도 472억원이 들어간 박물관은 외형부터가 특이하다.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선정한 프랑스 건축가 니컬러스 데마르지에르의 작품이다. 건물은 가운데가 트인 자연 둔덕을 연결해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원시 생명체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뱀 자체는 자연을 상징한다. 내부는 거대한 동굴처럼 꾸몄다. 아슐리안 주먹도끼 등 구석기 유물을 중심으로 인류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화석인류 모형, 선사 인류와 함께했던 거대한 매머드 등 동물 모형, 동굴 벽화 등을 볼 수 있다. 상설전시관 중앙에는 약 700만년 전 투마이인으로부터 약 1만년 전 만달인까지 화석인류의 모형이 서 있는데,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박물관은 특히 구경만 하는 곳이 아닌 체험 공간을 표방한다. 사냥 체험, 불 피우기, 석기 만들기, 가죽옷 만들기, 동물뼈와 조개 껍데기로 장신구 만들기, 원시요리법, 동굴벽화 그리기 등으로 선사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 직접 느끼고 고고학자가 돼 발굴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
유물 발굴이 박물관 건립으로까지 이어진 데는 전곡선사박물관 초대 관장으로 취임한 배기동 관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1979년 전곡리 유적에 대한 첫 발굴이 시작됐을 때 서울대박물관 조교로 발굴현장 총괄 소장을 맡게 됐다. 처음에는 조교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해서 했지만 어느새 천직이 됐다. 축제기간 100만명이 넘게 찾는다는 ‘연천전곡리구석기축제’를 만든 이도 그다.
박물관 건립이 시작되고부터는 박물관이 지역사회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연천군민은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박물관이 경기 북부 관광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박물관이 세워진 곳은 38선이 지나는 곳이다. 분단과 전쟁, DMZ와 생태 등으로 연계가 가능하다.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전곡선사박물관 개관에 거는 기대가 더 클 수밖에 없다. 박정임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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