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과일을 따먹고 농사를 짓던 원시를 지나 영주와 농노가 구분되는 중세사회로 가며 인간의 생활이 조금은 나아졌다. 한참 지나 산업혁명이 발생한 이후 대량생산(mass production)의 기틀이 만들어지고 풍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오래갈 줄 알았던 풍요의 세월은 1900년대 초반 대공황을 맞으며 흔들리게 된다. 이 때 케인즈(Keynes)라는 경제학자가 나와 ‘지금의 문제는 수요의 부족 때문이니 정부가 나서 정부지출을 증가시키면 국민소득이 증대될 것이므로 치유가 가능하다’며 정부지출증가를 처방으로 제시했다. 케인즈의 말은 적중했고 이후 경기침체가 있을 때면 늘 케인즈의 처방이 적용되며 경제운용이 이루어졌다.
지금 전 세계의 경제사정이 악화일로에 있다. 그리이스의 상황이 악화되며 유럽 전체가 흔들리고 있고 미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입장에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환율도 계속 상승일로에 있고 주가가 계속 폭락하여 투자자들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상황이다. 한 마디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미래에 대해 확신이 없으면 기업의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의 소비지출도 조심스러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소비나 투자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케인즈가 지적했던 수요가 부족해지고 수요가 부족하면 경기침체는 가속화될 수 밖에 없다. 모두들 미국의 눈치만을 보고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과거 ‘양적 팽창’정책의 약발이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정부개입으로 오늘의 침체를 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이래저래 한계적인 상황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모두를 풍요하게 만들 줄 알았던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의구심도 없는 것은 아니다. 첨단의 그 무엇이 없으면 국가이든 개인이든 미래가 불투명한 것이 현실이고, 여러 가지 목지혜택이 국가재정의 발목을 잡아 재정운용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제 진지하게 우리 모두를 돌아보아야할 시간이 된 모양이 다. 세계화보다는 한 나라 그리고 지역공동체에 관심을 가지며 이웃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세계화의 시장에서는 일등만이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등이나 삼등도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사라져버린 대가족제도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3대가 함께 살아간다면 육아나 탁아를 위한 비용이 현저히 줄어들고 젊은이와 노인이 함께 산다면 노인복지를 위한 재원도 많이 절약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남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만 우리 모두가 ‘빈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최영한 파주웅지세무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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