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개 비 내리던 날

눈처럼 가볍게 흩날리는 비, 는개가 내린다.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땅에 채 닿기도 전 스러져 버리는 것, 그래서 애틋한 비, 는개는 마음만 적시는 비다. 는개 탓일까. 아침부터 마음이 좀 심란한 참인데 때이른 연하장이 날라왔다. 성질도 급하긴, 아직 이 해를 보내려면 한 파수는 남았는데…. 하고 봉투를 열어보니 연하장에 기댄 퇴임 인사장이었다.

 

‘공직 40년을 여러분의 사랑과 격려로 무사히 마치고…’

 

읽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가 공직에서 퇴임을 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을 막 시작할 때였다. 아버지가 전근을 할 때마나 전학을 하느라 초등학교를 여섯 번이나 옮겨 다니며 친구도 변변히 못사귀고 그늘 속 풀잎처럼, 약병아리처럼 돼 있던 참이었다.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 둔다니 내게는 천둥번개가 한꺼번에 어깨위로, 덮친 지경이었다. 이제 우리 식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중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인가. 안해도 좋을 걱정에 파묻혀 그 때부터 철학아닌 철학을 했다. 그래서였을 게다. 나는 애답지 않은 애라는 칭찬 아닌 칭찬 속에 빛 바랜 소녀시대를 보내며 웃자라기 시작했다. 오래 뒤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던 작은아버지가 퇴임을 했을 때 나는 아버지가 퇴임했을 때 억장 무너지던 내 심정까지 담아서 간곡한 위로의 편지를 보냈었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편지를 들고 오셔서 그 사연 때문에 자기가 한참을 울었노라고 털어놓아 나를 민망하게 했다.

 

눈시울 뜨겁게 만든 퇴임 인사장

 

연하장으로 퇴임인사를 보낸 인사에게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할 것인가. 또 가슴 한 복판에서 는개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늦둥이로 얻은 중학생 딸이 있기 때문이다.

 

는개는 내려도 내려도 젖지 않는 땅 때문에 심통이라도 난것일까. 그치지를 않는다. 그래도 솔잎끄트머리에 맺힌 빗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져 는개도 비라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뭐라고 써야 할까. 퇴임하고 나면 우선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라고, 그렇게 평상적으로? 그렇게 써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고 그를 위로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내가 직장을 그만 두었을 때 누가 위로라도 할라치면 나는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려주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었다. 팽팽히 당기던 고무줄을 누가 느닷없이 끊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헛청대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던 참이기 때문이다. 소속감을 잃는다는 것, 할 일을 잃는다는 것, 갑자기 지위가 달라진다는 것, 그것은 고통이었다.

 

가족 사랑·존중하는 일이 남았다

 

이 엄동설한에 그는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소리죽여 혼자서 울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가족들을 위로하며 씩씩한 남편으로 아버지로 버티고 서는 척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리고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된 퇴임 후의 남자가 가져야 하는 덕목과 역할을 되새길 것이다. 또한 한국의 다른 가장들 처럼 쉽사리 ‘자유인’으로서의 자유를 버거워할 것이다.

 

최근에 뉴스를 탄 늙은 배우를 생각해 본다. 그는 자서전을 쓰면서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비밀을 털어놓았다. 아내 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를 지금까지 사랑하고 잊지 않고 있으며, 늙은 지금도 아내외의 여자가 있다고 자랑을 한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남편이고 아버지이고 애인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을 은퇴할 나이에 자신의 자랑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자존심을 얼마나 뭉크러 뜨렸는지 생각도 하지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답장을 이렇게 쓰기로 했다. 가족을 더 많이 사랑하고 진심으로 존중하는 일이 아직 남아있으니 열심히 복무하라고.

 

신효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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