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특집] 명성황후의 후예, 여흥 민씨 집성촌 여주 도리마을

세배만 해도 이틀은 훌쩍… 이야기 꽃 피우며 행복 나눠요

설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여주군 점동면 도리마을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한참이나 걸렸지만, 어머니가 손수 끓여주시는 떡국은 물론이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맛보는 가락국수를 생각한다면 그리 지겹지도 않다.

 

더욱이 여주 IC를 빠져나와 점동면으로 향하는 길은 확 트인 여주평야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 답답한 가슴 속을 뻥 뚫어주는 느낌이다.

 

1시간 즈음 달렸을까. 길이 구불구불해지며 돛단배 모양을 한 정겨운 농촌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앞쪽으로는 새하얀 안개가 걸터앉은 웅장한 소무산 아홉사리 고개가, 뒤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푸른 남한강을 가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서자 마을주민 절반 이상이 여흥(여주의 옛 명칭) 민씨라는 도리마을답게 양지바른 곳에 모셔진 여흥 민씨 조상의 무덤과 시제를 지내는 아담한 사당의 모습이 보인다.

새로 지은 마을회관 앞에는 마을의 상징인 느티나무 두 그루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온 자식들을 감싸 안듯 반겨준다.

 

▲ 여흥 민씨 집성촌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배출한 집안으로도 잘 알려진 여흥 민씨는 공자의 10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민자건의 후손 민칭도가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귀화, 고려 때부터 명문 가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민씨 가문은 조선 태종의 박해를 피해 한양에서 여주로 피신했고,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약 600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현재 50가구 가운데 30가구가량이 여흥 민씨 일가인 이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마을주민 3~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 세배만 해도 이틀은 훌쩍

 

도리마을은 여흥 민씨 집성촌답게 마을주민 대다수가 20촌 안에 드는 일가친척 사이다.

 

이 때문에 설과 명절 등을 맞이하면 객지로 떠났던 자식들이 하나둘씩 찾아오며 조용했던 마을은 왁자지껄하며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겨운 마을로 변신한다.

 

워낙 많은 수의 자식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이 마을은 설을 3~4일 앞두고부터 음식준비에 분주하다.

떡을 찌고 만두를 빚고 잡채를 만들고, 고기를 양념장에 재우고….

고소한 기름에 지져내는 전을 만들기 위한 재료 준비에도 정신이 없다.

 

조상께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1시간에 1대밖에 없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과일 등 제수를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는 않다.

 

이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각기 따로 음식을 준비하지 않고 모두 모여서 함께 음식을 준비한다.

 

여흥 민씨 28대손인 故 민영복 할아버지에게 20살때 시집와 6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김간난 할머니(73)는 “여기 모여서 음식을 하는 이들은 모두 어릴 때 민씨네로 시집와 이곳에서만 사는 토박이들”이라고 소개했다.

 

김 할머니는 이어 “설에는 자식들은 물론이고 시누이, 시동생 등 온 가족이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세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눠 먹어 정신이 없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 할머니의 말처럼 마을주민의 절반 이상이 모두 민씨네 일가인 이 마을은 집안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생활하기 때문에 고향을 찾아온 자식들은 세배하는데만 하루를 넘어 이틀이 걸린다.

 

세배를 워낙 많이 하고 받다 보니 세뱃돈 역시 만만치 않을까 걱정스럽지만, 돈보다는 과일과 약과 등 주전부리를 나눠주며 정을 나눈다고 한다.

 

여흥 민씨 29대손이자 종손인 민남식씨(64)는 “아침에 맨정신으로 집을 나서도 해가 질 무렵에는 꼭 술에 취해 돌아온다”며 “워낙 많은 집안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려야 하기에 술 한 잔씩만 받아도 얼큰하게 취하곤 한다”고 말했다.

 

▲ 차례도 마을잔치

 

도리마을은 여흥 민씨 집성촌답게 차례를 지낼 때에도 마을잔치가 된다.

 

모두가 친척이다 보니 자기 할아버지의 차례만 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침식사를 하기 전 각자의 집에 모여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다른 마을의 설날 아침 풍경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형제가 모여 아버지 제사를 치른 뒤 큰아버지 댁에 가서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또 큰할아버지 집으로 가서 또 제사를 지내고는 한다.

 

적어도 8촌까지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더욱이 민남식씨 집은 민씨 일가의 종택이라 각자 집안의 제사를 지내고 모여드는 마을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된다.

 

이 때문에 설 전날 오후부터는 제사음식 준비를 해야 하며 제사가 없는 집의 아낙들은 전날 밤 미리 모여 준비를 거들고, 제사가 있는 집 며느리들도 다음날 아침 제사를 끝내는 대로 남자들이 '순례'에 나서기를 기다렸다가 종택으로 달려간다.

 

제사상 설거지라도 하고 간다며 뜸을 들였다간 마을의 할머니들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시작된 차례는 이렇게 한바탕 마을을 휘젓고 난 오후 늦게서야 끝난다.

 

장귀숙 할머니(87)는 “처음 막 시집왔을 때는 명절 때마다 우르르 찾아오는 친척들 때문에 술상 차리느냐 떡국 대접하느냐 정신이 없었다”면서도 “설날이 되면 귀여운 자손들이 찾아와 세배하고 응석 부리는 모습을 보면 뭐라도 하나 더 먹여서 보내고픈 마음”이라고 전했다.

 

안영국기자ang@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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