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부메랑으로 다치고, 보수는 욕심으로 망한다’ 라는 말이 있다.
젊음은 화려하다. 화려함은 인생의 꽃이다. 진보는 젊음의 화려함에 코드를 댄다. 진보주의는 빠르고 경쾌해서 젊음이 선호할 매력을 보수보다 더 갖고 있다.
그렇지만 젊은 진보주의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이란 명구를 경구로 새겨야 한다.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의 그 생각체계에 대해 뼈아프게 후회하고 성찰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오만원이십니다” 하는, 아직 젊고 미숙해서 저지를 수 있는 귀여운 잘못에 대해 보수는 그 어른스러움으로 따뜻하게 “오만원입니다”라고 가르쳐야 한다. 변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 철저한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이런 가르침을 주고 또 이런 가르침을 순조로이 받아들일 때 보수와 진보는 아름답다.
사회가치 추구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 보수가 있다면 비겁하다. 또 정당한 가르침을 받아드리지 않는 진보는 더 비겁하다. 이런 진보일수록 ‘트라우마’가 크지 않을까 한다.
‘트라우마’가 있는 젊음은 공격적일 수 있다. 젊었을 때 더 특별히 치밀어 오르는 ‘리비도’가 방향을 잡지 못해서 파괴적이고 퇴행적일 수 있다. 젊음의 한 특징이다. 그러나 이걸 진보주의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욕말’은 ‘욕말’일 뿐이다. 욕말 함을 ‘견강부회’ 해 진보라 강변하면 이는 이미 진보가 아니다. 퇴행함을 변명할 뿐이다. 막말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학교 교실 현장에서 학생 간 대화를 보면 욕말을 빼면 대화 내용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욕구가 퇴행되고 있음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를 가르칠 보수의 손발을 묶어 놨다. 이런 것을 진보주의의 진전의 과정이라고 ‘썰’풀어서는 안 된다. 가르칠 것을 더 잘 가르치게 해 주는 것이 진보주의일 것이다.
알다시피, 욕구를 승화 처리한 것이 건전한 문화라고 한다면 욕말은 욕구의 퇴행적 처리이다. 욕말이 횡행하는 데도 가르쳐야 할 교사가 가르칠 수 없는 구조라면 가르침의 퇴행 구조가 된다.
퇴행! 6·25는 북침이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이 한 짓이 아니다. 탈북자의 절박함을 외면한다. 이어져 북한은 8억5천만 달러를 들여 로켓인지 미사일을 날렸다. 이런 북한에 대해 촛불의 10분의1만큼이라도, 건강성을 보이는 에너지를 모아 규탄의 열정을 보였다면 결코 역사 퇴행은 아니다.
‘죽은 경제학자들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쓴 바 있는 하버드대 교수인 토드부크홀츠는 그의 저서 ‘RUSH!’란 책에서 경쟁과 성취욕이 주는 행복을 버리고 ‘느림과 휴식’ 그리고 그 유사의 ‘공평 분배’의 쫄깃한 맛만 느끼고 살기에는 인간이 너무 진화했다고 했다. 느림과 휴식으로 경쟁없는 지상낙원에서 유유작작하게 살기만을 추구 하다간, 자칫 마틴 셀리그먼의 실험에서 나타나는 ‘학습된 무기력자’를 양산하게 돼 인류는 그만, 행복함의 삶을 진전시킬 수 없다고 한다.
보수 가치는 사람의 자유로움과 각 개인의 창의성을 제고하고 발현하게 함을 추구한다. 자유로움과 창의성 제고에서 경쟁이 있을 수 있다. 과도한 경쟁에는 폐해가 없지 않다. 그렇다고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마저 태우는 격으로 경쟁없는 사회를 기계적으로 만들어, 진화된 인간의 행복을 강박하려함은 또한 유형의 인위적인 퇴행인 것이다. 북한의 사회체제가 그걸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젊음을 보면 참 예쁘다. 저 예쁜 젊음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보수는 욕심을 버리고 진보는 퇴행이라는 부메랑을 버려야 할 것이다. 학교가 ‘행복교육’ 할 수 있도록 학교다움을 회복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김창진 인천 용마초교 교장·통일부 통일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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