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봄 날이 지고 있다

짧디 짧은 봄. 봄이 지고 있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아마도 천지만물을 창조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자신이 만든 그러한 정경을 흘깃 보고 지나치나 보다. 그래서 봄을 그냥 ‘봄’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나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 테마 중 하나지만 나이 든다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세월이 빠르다는 것, 흐르는 시간이 아쉽다는 것. 그래서 쓸쓸하고 공허하다는 것.

팔순을 여러 해 전에 넘긴 노 화백 한 분은 그 심경의 수위가 나보다 한 수 더 높으셨던가 보다.

마나님이 친구분들과 꽃놀이를 떠나고 난 4월 어느 날 문득 자신도 꽃구경을 하고 싶더란다. 그날 아침부터 비가 제법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는데, 꽃을 보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못견디게 사무쳐서 우산 한 자루를 들고 경기도 ○○에서 거의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윤중제까지 차를 바꿔 타며 달려 가셨단다. 아마도 아직은 벚꽃이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고, 빗속에 지는 꽃잎을 바라보는 것도 운치가 있으리라는 지극히 예술적인 감상을 가슴에 담은 채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바람이었던지, 겨우 여의도에 다다라 윤중제에 가보니 빗 결에 흩날리는 꽃잎은 커녕 바람까지 보태 비바람만 세차게 우산을 휘젖더란다.

빨리 지나가서 더 안타까운 ‘봄’

가슴으로 그 비바람이 다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갑자기 롤러스케이트라도 탄 듯 시간이 가차없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고, 벚꽃, 그것 하나 못 본 것이 새삼 가슴을 에이더란다. 내년 벚꽃을 볼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데 올 봄 벚꽃을 놓치고 말다니, 황혼 녘 마지막 열차에 정든 이를 떠나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쓸쓸하고 서글프더라고 했다. 노 화백은 말끝에 나직한 한숨까지 내쉬어서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가슴이 아렸었다.

그랬다. 노 화백의 넋두리에 가까운 심경 고백 앞에 나는 지는 봄의 아쉬움,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이 빨라진다는 감상 따위를 차마 털어 놓을 수가 없었다.

노 화백은 마나님이 안 계신 동안, 문득 혼자 있다는 적막감 때문에 입맛도 사라지고, 잠도 오지 않고, 봄은 정말 잔인한 계절이라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봄은 잔인한 계절”이라는 싯귀가 인생 말년에 뒤늦게 이해가 되더라고 했다.

봄의 서글픔, 창작의 에너지로…

그러고 보니 소위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를 언제 썼던지 기억조차 아물하다.

언론인으로 평생 삭막한 얘기만 쓰다 보니 감정이 매말라져서 시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핑계에 불과 할지 모른다.

시를 써야지. 내 경우, 시는 불행의 감정들, 이를테면 버려진 것 처럼 외롭다던지, 서글프다던지, 쓸쓸하다던지, 하여튼 행복과는 먼 감정 속에서 잉태됐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행복도 불행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치가 되어 살아온 것 같다.

다행이랄까. 이 봄, 새삼 세월이 나를 몰고 달린다는 쫓기는 초조함이 나를 불행하게 하고 있다. 지는 꽃잎이, 피는 꽃송이가 그리고 푸르러 가는 나뭇잎들이 초침처럼 빠르게 시간을 재촉하고 있다. 아쉽다.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가슴에 괴기 시작한다. 시를 써야지.

노화백이 전화를 했다. 평생 보고 이번 봄에 못 본 벚꽃을 화면 가득 그리고 있노라고. 떠나는 봄을 유예시키는 편법을 쓰고 있노라고.

신효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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