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껴묻거리 (副葬品:부장품)

새벽, 동해바다를 향해 달렸다. 일상에 짓눌려 무디어진 마음을 수평선의 예리한 날에 벼리고 싶어서였다. 강릉에 들어서니 경포호 인근의 명소들이 앞 다투어 손짓했다. 난설헌로를 따라 남아있는 조선조의 명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선교장을 시작으로 매월당과 허균, 허난설헌 남매를 만났다. 오죽헌을 나오자 강릉 시립박물관이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품들은 강릉지역에서 출토된 선사 유물이 대부분이었다. 밝지 않은 실내에는 서화(書畵), 도자기 등이 나른한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 때 가벼운 피로감을 거뜬히 날릴 수 있는 전시품이 나를 붙들었다. 그것은 ‘껴묻거리’로 선인들의 부장품(副葬品)이었다. 이장할 때 발견되었다는 조선조 어느 선비의 지석(誌石)은 망자의 행적을 해서로 음각하여 분청사기 제조 방식으로 구워낸 것이었다. 흰색과 자수정 빛 구슬도 옛 주인을 기억한다는 듯 흐릿하게나마 반짝였다. 강릉 최씨의 묘에 묻혔던 묘지(墓誌)도 오랜 시간 흙에 묻혀 있다가 비록 진열장에서나마 바깥세상 맛을 보게 된 유품이었다.

‘껴묻거리’의 유래는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인들은 가족과 친지의 죽음을 애도하여 생전의 애장품을 매장했다. 사후 세계에 대한 염원도 함께…. 그곳에서도 유용하게 쓰라는 남은 이들의 배려였을까. 그 정도로 그쳤으면 좋으련만 부장품목의 진화는 상상을 초월하게 변질되었다.

연전의 중국 기행 중 보았던 섬서성(陝西省) 서안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이 떠올랐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가 발견했다는 그곳은 한 여름이었으나 냉기가 감돌았다. 끝이 아스라하던 용갱 내부에는 표정도 생생한 수천 명의 군사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말, 전차가 명령만을 기다리는 듯한 전투 대형으로 정렬하고 있었다.

영생에 대한 집착이 유난했던 시황제는 진나라 집권 초기부터 제 무덤의 터를 잡아 36년간 공사를 벌였다. 거대한 지하군단이었던 호화판 무덤도 모자라 기밀유지를 위해 인부들까지 묻어버렸다던가. 요즘 세상이라면 촛불 시위나 SNS를 통한 여론몰이로 어림없었으리라. 병마용갱이 세계 여덟 번째 불가사의로 등재되면서 만리장성의 명성을 뛰어넘었다지만, 이는 문화재가 아닌 인간 무한한 욕망에 대한 기록으로 남아야하지 않을까.

박물관에 남은 망자의 흔적을 뒤로하고 그토록 간절했던 경포바다로 향했다. 생몰(生沒)에 연연하지 않은 바다는, 예의 그 모습으로 동기가 불분명한 적의를 품은 채 스크럼을 짜고 밀려들었다. 나를 삼킬 듯 달려오던 포말군단은 모래톱에 이르러서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부질없는 열정이었다. 태고적부터 해온 일이 지루하지도 않은 것일까. 바다 앞에 서니 저잣거리의 갈등과 고통쯤이야 흔적도 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가벼움으로 변해버렸다.

지리산을 벗 삼은 어느 시인은 관 값 200만 원만 빼놓고 나머지는 남겨두지 않겠다고 했다던가. 나야말로 ‘껴묻거리’로 그 무엇을 가져갈까. 그러나 바다 한 사발, 몇 줄기 갯바람, 쪽빛 하늘과 구름 한 장도 담을 수 없다면 내게 무슨 위로가 될까.

엄 현 옥 문학평론가·국제펜 인천지역委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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