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센티멘털 해 지고 싶다

센티멘털 해 지고 싶다. 이 찌는 폭염 속에 웬 센티멘털이냐고.

그래서 이상한 거다. 6·25전쟁으로 온통 나라가 치열한 절망으로 암울하던 시절 대중가요 ‘남쪽나라 십자성’이 유행했던 것 처럼, 현실의 척박함, 혹은 곤혹을 이기기 위해 전혀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는 건지도 모른다. 더웁다. 찌는 더위, 혹서, 타오르는 여름, 어느 말로도 설명이 안될 만큼 더웁다. 연일 갱신되는 최고 기온 수치가 더위를 더 더웁게 하고 있다. 이 더위를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경제불황으로 인한 내핍과 절약 정신으로 에어컨 가동도 가급적 절제하는 상황에서 이 찜통 더위를 어떻게 이기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여름을 이기는 나만의 비법을 활용한다. 책에 파묻혀 지내는 거다. 어느 해 인가는 추리소설을 수북히 쌓아놓고 읽으며 여름을 잊었다. 범인과 벌이는 극적인 스릴과 서스펜스에 빠져들며, 오싹한 순간을 거듭거듭 맞으며 더위를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웬 센티멘털이냐고?

찜통더위 이기는 나만의 비법

이유가 있다. 이번 여름에는 세계적인 에니메이션 영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쌓아놓고 보고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 등 영상물의 등급은 스토리가 탄탄한가, 대사에 문학성이 있는가, 영상의 미학이 우수한가, 전체적 내용에 철학적 메시지가 있는가를 따져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는 그것들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화면의 아름다움과 상상력은 보는이를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내용의 순정함과 기발난 상상력은 이미 오래 전에 잊었다고 생각하는 감각과 감성을 일깨운다. ‘그래 나도 저만한 시절에 저런 설레임과 아픔이 있었지’ 애틋한 몽상에 젖게 한다.

이미 잊었다고 생각하는 감정들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내용 속의 주인공들이 다소 유치하지만 설레는 감정을 주고 받을 때 나는 덩달아 감정이입이 되어 몇십년 전의 한 장면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때였나? 중소도시에서 학교를 다닌 나는 점심시간이면 집으로 가서 밥을 먹곤 했다. 측백나무가 담장 대신 서있는 세무소 뒷골목은 학교와 집 사이 지름길이었다. 그 길로 점심을 먹으러 다니곤 했는데 언젠가 부터 어떤 남학생이 나보다 앞서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남학생은 그 시절 유행하는 대중가요 ‘외나무 다리’를 휘파람으로 불며 다녔는데 이상하게도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서 꼭 한번 멈춰서서 나를 바라보다 가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의식하고 나서부터는 어쩐지 그 골목으로 접어드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그 일은 고등학교를 마칠때 까지 계속됐지만 한번도 말을 건넨다던지 했던 일은 없었다. 어째서였을까. 아마도 지금 애들 같으면 곧바로 연애로 이어졌을 것이다.

좋은 작품과 함께 추억여행 떠나보자

이 더운 여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를 보며 웬일로 나는 그때의 그 일이 아련이 떠올라 사뭇 애틋하기까지 하다. 어째서 골목 끝에 멈춰서서 한번 돌아보고 가버렸는지 이제 그 이유를 들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렇게 미완성으로 끝난 감정유희여서 그런지 이따금 그 일이 불쑥 떠오르곤 한다. 아무런 진전도 없었던 그 일이 소중하기까지 하다. 진전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그 시절을 순결하고 소중하게 생각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센티멘털을 꿈꾸는, 소중한 기억을 들춰내게 한 이여름을 언젠가는 또 기억할 것이다.

신효섭 시인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