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수원 기생

흔히 ‘기생’하면 화류계, 매춘 등 천한 여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황진이’하면 글과 그림, 춤과 음악에 능한 종합예술인으로서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논개’하면 자신의 몸을 던져 절개를 지켰던 의로운 기생으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서도홍’과 ‘김향화’는 어떨까? 추측하건데 대다수 사람들은 이들이 누구인지 전혀 모를 것이다. 따라서 떠오르는 이미지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 역시 기생이다. 1910년대 수원예기조합 기생들의 출신과 약력, 뛰어난 기예 등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 ‘조선미인보감’에 보면 이들은 수원을 대표하는 기생으로 묘사돼 있다.

15세에 기생이 된 서도홍은 그 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은 가히 꽃과 같고 달과 같다고 한다. 또한 섬섬옥수 붓을 잡아 익숙하게 그린 난초는 그녀가 서화에도 능한 재주와 운치가 있는 기생임을 보여주고 있다.

경성에서 나고 자라 수원에서 기생이 된 김향화는 수원예기조합의 꽃으로 갸름한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나 목청은 탁 트여서 애절하면서도 구슬프게 노래를 잘하며, 성정이 순하고 모습이 귀여운 기생으로 그려져 있다. 검무와 승무를 들 수 있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다.

 

이 두 명의 기생과 더불어 당시 수원예기조합에는 33명의 기생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춤과 노래에 능했으며 시·서·화에 대한 교양과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평상시 기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했지만 시간만 나면 각종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민족적 학교의 전신인 수원상업강습소가 자금난에 봉착하자 자선공연을 펼쳐 수익금을 교실 증축기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고아원, 유치원 등 교육비 보조를 위한 공연이나 빈민구제를 위한 자선공연활동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수원기생들 역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하였다. 3월29일에 자혜의원 앞에서 30여명이 만세운동을 이끌었으며 야간에는 상인, 노동자 등과 합세하여 일본인 상점에 투석하여 유리창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향화는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끈 주모자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해야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렇게 봤을 때 서도홍과 김향화로 대표되는 수원기생은 황진이의 후예요, 논개의 계승자라 칭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 싶다. 때마침 ‘수원예기보존회’에서 수원화성의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역사기록 중에 여성과 기생을 화두에 두고 ‘기생-화젯거리’라는 제하의 공연을 펼친다. 이번 공연을 통해 기생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길 기대해 본다.

염상덕 수원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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