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21일 김좌진 총사령관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은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골짜기에서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이던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부대원 2천여명을 사살하는 항일전투사에 가장 큰 승리를 거둔다.
당시 일본군 토벌연대 본대는 자기 편의 시체를 쌓아 은폐물을 만든 뒤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1천200~1천300명의 전사자만 더 내고 패주했으니 초기일본제국이 겪은 가장 참담한 패배였다.
얼마 전 ‘백야 김좌진(金佐鎭)장군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항일역사탐방’을 다녀왔다. 총 6일간 버스와 열차로 3천㎞를 달리며 한 세기 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길을 따라 숨져간 고결한 임들의 숨결을 곳곳에서 만났다. 또한 도도히 흐르는 압록강 너머 분단의 땅 북한은 일제 36년의 상흔이 현재 진행형임을 말해주었다.
김좌진 장군은 충남 홍성의 부유한 명문가 출신으로 16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전부 나눠준 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김두한은 청계천 수표교 밑에서 걸식을 하며 자랐고, 그가 아버지 김좌진을 만난 것은 평생에 단 한번 뿐이었다.
광복 이후 67년이 흘렀지만 항일애국지사의 후손들의 ‘빼앗긴 들’에 봄은 요원하기만 하다.
모 포털사이트가 얼마 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대학생 10명 중 9명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우리나라 친일 청산 수준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1.1%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답했고 35.7%는 ‘친일 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몇 해 전 국민들을 격앙케 했던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이 몇 조원에 이르는 땅 찾기 소송에서 일부 승소하여 수십억원을 벌어들인 사건은 이 땅에 친일청산의 수준을 말해준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과 일왕에 대한 사과요구로 인해 한·일관계가 들끓고 있다. 독도와 역사 문제에서 양국의 갈등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경제·문화·민간교류 등으로까지 번져가는 최근 양상은 이례적이다. 정권교체기를 앞두고 있는 양국 사정상 관계 회복은 다음 정권에서나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백년전 우리 선조는 항일(抗日)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이제는 극일(克日)을 위해 국력을 키우고 국론을 모아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때다.
함진규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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