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꽃 보시(普施)

재능기부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 기분은 참으로 난감했었다. 기부할 재능이 나에게 있던가? 즉각적으로 떠오른 물음 때문이었다. 기부라는 단어와 재능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그리 만만치 않은 크기였던 것이다. 좋은 일이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여전히 막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과 함께….

올 봄쯤이었을 것이다. 작은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공연장소를 찾을 때였다. 지인으로부터 헌책방 한곳을 소개 받았다. 책방 안에 작은 공연이 가능한 간이무대가 있었고 옹기종기모여 앉아 커피를 마실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민들과 책읽기와 공연이 이루어지며 주민들의 소중한 일상 문화공간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멋진 삶이다.

나는 주인장하고 방문한 목적을 얘기하면서 공간을 빌려주십사… 재능기부 한다고 생각하시라… 고 말을 건네고 나서 아주 혼쭐이 났다. 이유는 이랬다. 요즘 여기저기서 원고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결론은 재능기부란 명목으로 거저 써달라는 얘기였단다. 글 써서 겨우 먹고사는 글쟁이한테 거저 써 달라면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재능기부 말만 들어도 화가 난다는 거였다. 순간 재능기부는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당위만 가지고 상대방을 압박하고 있는 민망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죄송하단 말로 수습했다. 그때 주인장의 솔직 당당한 말은 가슴 한 켠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었다. 부러웠다.

즐거움이 이웃으로 전이되는 삶

지난 주는 많은 행사가 집중된 주말이었다. 증평문화의집 운영자로부터 온 초청전화가 고마워서기도 했지만, 행선지 중간에 위치한 이유도 있어 증평에서 열리는 축제에 갔었다. 그곳에서 야생초(야생화가 아닌 야생초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전시장을 안내해줬다. 국화전시는 본 적이 있으나 야생초 전시는 처음이라 관심을 갖고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몇 가지는 우리집 마당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었는데 쑥부쟁이, 줄무늬 둥글레, 바위취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이름은 생소했으나 모양은 많이 본 것이었는데, 그런데 달랐다. 그 품위와 아름다움이 우리 집 마당의 것과 많이 달라 보인 것이다. 겅중하게 키가 큰 쑥부쟁이는 줄기 아래가 말라 버스럭거리는 이파리를 달고 있었는데도 모딜리아니의 푸른 눈을 한 긴목의 여인 같다고 할까. 어쨋든 우아하기까지 하다고 할 수 있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전체적인 조화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라고 나름 결론을 지었다. 화분의 모양과 재질, 크기 그리고 심기어진 꽃들의 크기와 개수, 함께 코디된 부재 야생초까지 전체적인 조화가 주는 품위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꽃에 어울리는 화분을 찾아 청주까지 다니셨다고 한다. 이 날 난 야생초가 들판 ‘野’에서 자라는 꽃이라기보다 ‘야’함을 숨겨 피워내는 꽃이라고 머릿 속에 입력 했다. 촌스런 도시녀의 야생화 감상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껴보는 훌륭한 기회였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야생초 동아리 회장님은 화분하나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작은 감국을 점지했다. 우아한 아름다움이 깃든 흔치않은 꽃 같아서이지만 우선 크기가 작아 가지고 가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장님이 내년에 하나 더 키워서 주신단다. 지금은 유일한 화분이니 몇 개 더 만든 후에 나눠주겠다고. 이렇게 씨앗이 있거나 작은 뿌리를 얻어서 키워 여기저기 나눠주신다고 한다. 기르는 방법도 가르쳐주면서. 그리고 한 마디 던지신다. “꽃 보시 하는 거지 뭐!”

그것이 진정한 ‘재능기부’ 아닐까

꽃 보시! 참 예쁜 말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귀하게 가꿔 남에게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꽃을 잘 기르는 것도 그렇지만 그 꽃의 아름다움을 최대로 살려내는 심미안은 그야말로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재능기부는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책방을 주민들과 즐겁게 책 읽고, 노래하고 시를 낭송하는 공간으로 삼고 사는 삶. 꽃을 아름답게 가꾸는 즐거움이 옆집으로 전이되는 삶. 이미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삶이 아닐까.

민병은 (사)한국문화의집협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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