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자유로운

제 기억 속의 초등학교 운동장은 무척 넓었습니다. 축구선수들이 운동장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뛰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고 부러웠습니다. 그렇지만 20대 들어 다시 가 본 운동장은 ‘어렸을 때 왜 크게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고 답답했습니다. 제 몸이 커지지도 했고, 그 사이에 더 크고 넓은 운동장을 자주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의 고전인 장자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매미와 새끼 비둘기가 그것을 보고 비웃으면서 말합니다. ‘우리는 한껏 날아 보아야 겨우 느릅나무나 다목 나무에 이를 뿐이고, 어떤 때는 거기에도 못 미쳐 땅에 내려앉고 마는데, 구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간다니.’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더 큰 세상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우화적인 일깨움입니다.

문득 생각이 지금의 ‘나’에 머뭅니다. 지난 12년 동안 ‘자활’이라는 곳에서 센터장도 하고, 실무자들 그리고 자활을 통해 자립하고자 하는 가난한 이들과 나름대로 부대끼며 살아왔습니다만 요즘 들어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렇다면 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장자는 이것을 4단계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아는 것이 벼슬자리 하나 채울 만한 사람, 행위가 마을 하나를 돌볼 만한 사람, 덕이 임금 하나를 섬길만한 사람, 재능이 한 나라를 맡을 만한 사람, 이런 사람들을 일러 그 기량(器量)이 메추라기만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수준이기도 합니다.

둘째 단계는 주위의 칭찬이나 비난에 개의치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칭찬과 비난을 칭찬과 비난으로 의식한다는 점에서 완전치 못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열자(列子)와 같은 사람입니다.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보름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유롭기는 하지만 아직도 바람이라는 외적 조건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최고의 단계는 아닙니다. 넷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되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보다는 우리 자신 스스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세속적인 가치판단이나 기준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이병학 경기광역자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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