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2013 레미제라블-회복적 사법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열기가 심상치 않다. 1862년 출간된 이래 프랑스에서 성경보다 더 많이 읽힌 이 소설의 유명세야 익히 알고 있는 터이나 지난 연말과 새해에 걸쳐 도서판매의 증가는 물론 영화, 연극, 뮤지컬 등으로 장르를 불문하고 문화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레미제라블의 부활과 귀환은 이채롭다.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포용과 인간애가 소설 레미제라블을 관통하는 사상이요 화두일진데, 어쩜 오늘처럼 각박한 세월, 사람들의 가슴에 담아내는 삶의 처연한 냄새가 시대를 가로질러 그때의 장발장을 고개 끄덕여 공감하며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공동체가 자신을 배려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포기한 채 19년이란 긴 세월의 징역을 빵 한 조각 얻기 위해 수용할 수 밖에 없던 18세기 격동과 암흑의 시기, 그 역사의 격량에 휩쓸려 간 삶이 어디 장발장 하나이겠는가. 16세기 이후 근대 인문주의(人文主義)의 발현으로 형사처벌의 잔혹성과 비합리성을 배제하고 형사제도를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목적추구의 도구로 지향시키려는 사명을 띄고 이미 형사학이 태동되었고, 암스테르담 징치장의 입구에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희들의 악행에 대하여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선으로 인도하려는 것이다. 나의 손은 엄하나 나의 마음은 온유하니라’ 라는 문구까지 걸리며 행형처우의 근대화 바람이 불기도 했으나. 형벌제도가 그 낙후성을 탈피하고 자리 잡기에는 더 많은 시간과 희생자가 요구될 수 밖에 없던 시기였으리라.

가난 때문에 범죄자 되는 사람들

그러나 범죄자(출소자포함)가 저주와 처벌의 객체가 아니고 과학적인 교정선도와 사회복지를 위한 재교육과정의 후보자로 보는 오늘의 문명된 형벌의 시대에도 출소자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장발장을 향한 자베르 경감의 그것보다 결코 따뜻하지 않고, 전과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갱생을 각오했던 많은 출소자들이 신상 털기를 두려워하며 장발장처럼 잠행하고 배회하는 현실은 더욱 아프다.

일 년에 교정시설을 왕래하는 자가 12만 명이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은 가난의 굴레에 갇혀 있는 자들이며, 이들의 범행대상, 즉 범죄의 피해자들 또한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대부분이다. 가난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가난해서 손쉽게 범죄에 노출되는 가난의 악순환이 범죄지도에 아프게 상형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출생을 포함, 깡마른 청춘과 가난의 이유는 변명할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 줄 아량이 사회에 필요하니 이것이 곧 회복적 사법이다.

용서ㆍ화해로 공동체 복귀 도와야

회복적 사법 또는 회복적 정의는 범죄자 뿐만 아니라 범죄와 관련된 피해자, 가족, 지역공동체와 같은 보다 넓은 맥락에서 범죄를 이해하고, 범죄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상처를 회복한다는 의미다. 회복적 사법의 목적은 가해자의 책임인식과 사죄와 배상을 통해 피해자가 당한 정신적·물리적 피해를 회복하고 갈등의 당사자가 서로 화해함으로써 가해자에 대한 규범합치적 행동양식을 회복하고 다시 공동체에 복귀하도록 촉구하는 제도로서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적극시행하고 있다.

최근 파렴치한 성폭행사범의 증가로 범죄자에 대한 사회 일반의 증오감이 격앙된 탓에, 범죄자 교정·교화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멀어지는 듯 해 언급하거니와, 교정시설에 수용된 많은 수의 재소자들은 레미제라블 속의 가난했던 장발장을 많이 닮아 있음을 영화 속에서 혹은 연극 관람 중에라도 한번씩 상기해 보았으면 좋겠다. 소외된 이웃에 가슴을 여는 훈련이다.

이 태 희 前 법무부교정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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