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제자 녀석이 내게 열등감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간단했다. 그 열등감 때문에 소설을 쓰고,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노라고.
어릴 적 내 별명은 ‘양갈보’였다.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은 누렇다 못해 노랗게 바래 가는데다가 주먹만한 코를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지촌이라는 내 고장의 특성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마을의 오른쪽으로 미군부대가 있고, 왼쪽으로 나가도 미군공군기지가 있다.
나는 그 별명이 외국인처럼 생겼다는 단순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겼지만, 양갈보라고 놀려대는 아이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논둑길을 울면서 돌아온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 별명의 부당함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성인이 되고나서 그 미군부대라는 거리의 분위기를 파악했을 때였다.
지금도 내 고장 평택에서는 특별하게 생산되는 것이나 유명한 문화시설 등이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중부지방이어선지 양질의 중고차가 많고 전국적으로 거래량이 상당히 높다. 그래서 평택의 특산품은 중고차라는 말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시골마을에서 빈농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니, 태생부터 우월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쇠죽을 쑤고 동생을 돌보면서 유년을 보냈다. 그렇게 자란 내게 사람들은 겸손하다고 칭찬을 했다. 그러나 내 속에는 겸손과 오만이 정확히 반반씩 들어 있었다. 취업을 위해 대학은 관광학과를 졸업했지만, 내 속의 오만함은 배고픔의 해결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과대망상’을 키우기로 했다. 소설가가 되려는 과대망상을 품고, 서른 중반에 다시 국문과에 입학했던 것이다.
유년시절부터 웅변원고를 쓰면서 문예반을 들락거리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오기를 품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서른 중반의 아줌마가, 졸업한 지 15년 만에, 어린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그 민망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힘은 과대망상이 아니면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5년 뒤에, 내 고장의 특산품인 중고차를 소재로 쓴 소설이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다.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방향에는 차이가 있다. 사랑이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의도가 달라 보이는 것처럼. 내 열등감은 건강하고 좋은 에너지를 창조하는 데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때의 과대망상은 분명히 내 속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씨앗이었을 것이다.
가끔 독자들이 습작시기를 어떻게 보냈느냐고 물으면, 나는 당연히 이렇게 대답한다. “괜찮은 ‘과대망상’ 한 번 키워보세요!”
한 지 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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