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싶어 떠났지만… 막장속에서도 창작열은 타올랐죠”

‘파독광부 출신’ 김현태 시인

“파독광부(派獨鑛夫) 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동료가 흙더미에 깔려 죽는 모습을 봤을 때 가족의 품이 그리워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20년 전 군포와 인연을 맺은 이래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는 열혈시인 박현태씨는 가난한 고국을 떠나 돈을 벌고자 독일로 향했던 43년 전의 기억을 꺼냈다.

1960년 초 시인 김규동 선생이 운영하던 한일출판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 그때 당시 월급 5~6천 원으로 점심 한 끼를 해결하기조차 어려웠다고. 29살에 결혼해 둘째를 임신한 아내 김연옥씨가 처형 집에서 얻어 온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갓 돌 지난 아들까지 가장의 무게가 어깨를 누르던 그때 박씨의 눈에 독일 파견 광부를 모집한다는 안내지가 들어왔다.

때마침 현대사조사라는 출판사를 직접 운영했으나 경영난에 힘들어하던 박씨는 “살고 싶어 잠시의 망설임 없이 파독 광부로 지원했고,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겔젠키르헨 광산에 도착해 1천200m 깊이의 막장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뼈를 깎는 고통의 나날에도 불구 박씨의 창작열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막장 광부생활을 하면서 고국의 아내를 그리워하며 틈틈이 시를 써갔고 첫 작품집 ‘미완의 서정’을 출간했다.

‘아내야 지금 여기는 북해(北海)의 소금가루 날리는 라인강 벌판이다(중략)…아내여 오늘은 영교·민교 녀석 사진을 꺼내어 보고 고향의 꿈을 꾸어야겠다.’

시(時) ‘미완의 서정’ 한 구절구절에는 아내와 자식에 대한 필부의 사랑이 시어(詩語) 곳곳에 묻어난다.

박씨는 “평일에는 막장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독일 부잣집 잔디밭을 깎는 아르바이트를 번갈아 하며 외로운 타국생활을 감내했다”고 말했다.

현재 ‘수리담시’라는 동호회에서 7년째 강의를 맡은 박씨는 허리 한 번 못 펴고 잔디 깎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맥주를 즐기는 독일인의 모습에서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낀 점 등을 통해 서구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순수함을 잃지 말아 달라는 호소에 집중하고 있다.

40여 년 전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열심히 일한 순수함을 요즘 젊은 세대들이 잊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박씨의 목소리에 후배들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군포=김성훈기자 magsai@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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