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선이 폐선됐던 원인 중 하나가 좁은 협궤열차였다. 경인선이나 경부선, 경의선 등에 사용된 철로의 간격보다 훨씬 좁은 협궤열차였다. 이 때문에 기존 철로에 맞춰진 열차가 수인선에서는 운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협궤열차는 문화역사의 보존 가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처럼 일본제국주의는 한반도 전국토를 자신들이 이익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한국인들을 노동자로 강제 동원하여 건설한 곳들이 많다. 최근 부평미군부대 시민참여협의회가 기자회견에서 밝혔던 캠프마켓의 땅굴, 즉 지하갱도도 일제강점기 시절에 건설된 군수관련 시설이라는 점에서 주목 받는다. 캠프마켓 이전의 역사는 일본의 군수시설을 생산하는 조병창 기지로서의 부평과 연관돼 있다.
부평은 해안과 가까이 접해 있으면서도 철마산과 만월산 등으로 보호되어 있는 분지형이다. 때문에 해안으로 접근하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도 보호될 수 있는 지정학적 조건 외에도 서울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경인선이 부평을 지나는 것도 중요 요소였을 것이다.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 만들어진 조병창 시설의 일부였던 88정비부대의 자리(현 부평공원)에서도 지하 갱도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공원조성과정에서 흘러 나왔다.
이런 와중에 캠프마켓에도 땅굴, 즉 지하갱도가 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나왔다. 이 목격자들은 캠프마켓에서 몇 십 년 근무했던 사람들이다. 때문에 이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들이 목격한 지하갱도는 아마도 일제 강점기 시절조병창에서 생산된 군수물자들은 해안가로 이동하기 위해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은폐하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원통이 고개만 뚫으면 곧바로 주안까지 들어오는 인천바닷물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군사적인 측면에서 적극 시도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지하갱도가 실제 원통이 고개를 넘었는가 넘지 못했는가도 매우 중요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 역사를 다시 써야할 것이다. 때문에 캠프마켓이 반환된다면 과거의 유산들에 대한 정확하고 실증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지 하갱도가 원통이 고개에서 멈추었는지 실제 동암이나 주안까지 연결 되었는지도 밝혀야 한다. 그러나 연결 여부와 관련 없이 지하갱도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역사의 교육 자료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그런 자료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 사회의 사례 등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그들은 이런 역사 유적들을 경제적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역사라는 가치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즉 경제성보다는 후세에 대한 역사 교육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매우 높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사례들을 토대로 캠프마켓에 대한 판단 기준을 잡을 때, 수인선 협궤열차를 폐기한 것과 같은 우를 다시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곽경전 부평미군부대 시민참여協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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