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소론의 영수였던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은 큰 소리를 치며 영조의 조치에 극구 반대하다 죽음에 직면하기도 하고, 대사헌이었고 후일 영의정에 올랐던 서지수(徐志修)는 세자를 음해한 김상로와 홍계희를 탄핵하는 등 사도세자의 생명 보호에 진력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바램들은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1789년 서울 배봉산의 사도세자 무덤 영우원이 융릉으로 천장되고, 1800년 정조가 승하하시면서 아버님 무덤 발치에 시묘살이 형상으로 자신의 능을 조촐하게 축조하였다.
융건릉ㆍ용주사ㆍ만년제, 독산성까지
하지만 1821년 정조의 비 효의왕후 타계를 계기로 김조순은 이 첫 왕릉을 현재의 건릉으로 옮겨 놓았다. 그토록 절절했던 정조 효심의 최대 상징물인 첫 왕릉은 무참히 파괴되어 페허로 변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은 흐르고 흘러 1998년 주택공사는 이곳(태안3지구)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세웠다. 국토개발은 대상지역의 다양한 잠재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추진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주택공사는 융건릉-용주사-만년제가 위치한 경기 남부의 최대 역사문화지역에 무모한 아파트개발을 강행하여 우리나라 국토개발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이곳 세계문화유산지역 일대에는 수 만평에 달하는 정조대왕의 첫 왕릉터, 고려~조선의 읍치였던 수원고읍성, 백제고분군, 독산성 등 무수한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어 국가는 마땅히 역사문화지구로 지정하여 보존하여야 할 곳이다.
그러한 점에서 학계는 지표조사 단계부터 아파트 건설의 부당성을 지적하였으나 주택공사는 석연치 않은 배경하에서 안하무인식으로 무모한 개발을 강행하여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이곳의 역사문화적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현재도 LH공사는 잘못된 개발정책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없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개발 추진과정에서 문화재청이 현지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지 않고 안이하게 개발허가를 내주었다는 사실이다. 정조대왕 효심의 가장 큰 상징물인 왕릉터의 존재 사실 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후의 잘못된 현지실사와 총리실과 청와대에 대한 부실보고 등이 이어지면서 이명박 정부 당시 이곳을 효테마파크로 조성하려던 국정과제의 수행을 파행으로 몰고갔다. 결국 이 점은 문화재청 역사에서 큰 치욕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국가는 1997년 선포한 문화유산헌장의 <1. 문화유산은 주위 환경과 함께 무분별한 개발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선언을 철저히 실천할 단계가 되었다.
지난 8년간 필자는 이이장의 종손으로서 체제공의 후손(고 채호석), 유언호의 후손(유동준 정조대왕기념사업회 회장) 등 영조-정조대왕대 명신의 후예들, 학자들, 종교인들 및 많은 시민들과 함께 경기문화연대, 정조대왕문화진흥원 및 정조대왕기념사업회 등을 결성하여 태안3지구의 보존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왔다. 그리고 얼마 전 부터 서지수의 종손인 서청원의원이 정조대왕 왕릉터의 사적지 지정을 적극 추진해주고 있다.
국가문화정책 주요 아이콘 설정 촉구
이러한 영조·정조대 명신의 후예들에 의한 정조대왕 효심지키기운동에는 분명 정조대왕님의 보이지 않는 힘이 크게 역사(役事)하고 있는 것으로 동참자 모두 공감하고 있다. 참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이제 국가는 이 지역의 문제를 보다 전향적으로 검토하여 융건릉-용주사-만년제는 물론 독산성까지를 역사문화지구로 조속히 지정하고, 이곳 유적들의 보존과 활용문제를 국가 문화정책의 주요 아이콘으로 설정하여 줄 것을 현 정부에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이남규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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