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모르는 아내가 실수없이 당일 신문을 가져다 주는 것이 신기했던 남편이 어느날 물었다. “당신은 글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 날 신문을 가져다 주는 것이오?” “신문 냄새를 맡으면 알 수 있어요.”
오늘 지인에게서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신선한 충격과 함께 틀에 박혀 있는 관념의 지평이 고무줄마냥 주욱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미국에 사는 딸이 출산이 임박하자 딸의 산후조리를 도와주기 위해 70세가 훌쩍 넘은 그녀의 어머니는 전혀 영어를 모른 채 용감하게도 미국으로 혼자 날아갔다. 딸이 병원에서 제왕절개로 출산하고 입원하고 있는 중에 딸집에 남겨진 이 할머니는 딸의 상태가 궁금한 터였다.
해서 손짓발짓하며 물어물어 병원에 있는 딸 앞에 나타났다는,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소심한 필자로서는 믿을 수 없는 어느 용감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에세이집에서 읽은 것이 떠올랐다.
지식보다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산전수전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쌓은 내공과 연륜은 지식과는 관계없이 유연한 기지와 지혜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단순한 이치다. 글자가 발명되기 전 고대에는 온 몸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오감을 활용했던 그야말로 완벽한 전인간적인 삶을 살았다.
물론 소규모집단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1450년경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글자로 소통하는 시대가 열렸다. 글자는 사람들의 감성보다는 이성을, 종합적인 경험과 직관보다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수치와 계량화를 가져왔으며 오감을 사용했던 전인간적인 인간에서 글자를 해독하는데 필요한 눈만이 필요한 이차원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또한 직접 얼굴을 보고 소통하는 인간에서 글자를 통해 교류하는 고독한 인간을 양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어느 커뮤니케이션 학자는 글자로 인해 인간의 감각은 오히려 퇴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현대에 와서 인터넷이 생기면서 국경을 초월한 사이버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만들어졌고 동시간대에 지구촌의 많은 이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교환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구석기시대에 동굴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친밀감을 나눴던 신동굴문화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삼차원의 세계는 구석기시대에 직접 대면해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오감을 활용해 정보를 얻고 생존하던 때의 전인간적인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이다.
앞서 소개한 두 어머니는 글자라는 협소한 지식체계를 뛰어 넘어 자신들만의 경험과 생존방식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구석기시대에 본능과 오감을 활용해 살았던 선조들의 지혜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난하다는 이유로 혹은 여자라는 이유로 배우지 못했지만 본능과 직관과 경험을 통해 용감하고 지혜롭게 살아가시는,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리는 청춘들에게 모진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기둥이 되어주시는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께 존경을 보낸다.
이국진 칼럼니스트, 의정부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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