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자장면의 변신

70∼80년대 외식의 대명사였던 짜장면의 위상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국내 최초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옛 공화춘 건물에 짜장면을 테마로 한 박물관이 개관된 것이다. 자장면(짜장: Jajangmyeon)의 어원은 ‘간장을 볶았다’는 뜻의 ‘작장면’(炸醬麵)에서 유래한 말로 중국어 발음인 ‘zhajiangmian’에서 유래했다.

자장면의 중국말은 ‘자지앙미옌’(炸醬麵)으로 ‘튀김장(炸醬)을 얹은 국수(麵)’라는 뜻이다. 파기름을 듬뿍 붓고 양파와 춘장을 오랜 시간 볶고 삶아 건져낸 국수 위에 얹어 가늘게 썬 여러 생야채와 함께 비벼먹는 것이다. 중국의 ‘춘장’(春醬)이라고 부르는 자장소스는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만들어 온 밀가루와 콩으로 만든 메주로 만들며 우리나라의 고추장과 된장에 해당한다.

자장면은 쫄깃한 면발에 기름으로 볶은 고기와 채소의 깊은 맛과 발효장으로 고소한 맛과 향이 어우러져 우리나라 사람의 입맛에 맞게 변해가면서 우리음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자장면은 중국에서 왔지만 중국식 자장면과는 맛과 색상이 약간 다른 이미 한국화한 음식이다. 자장면이 한국에 언제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밝혀줄 자료를 찾기는 어렵다.

자장면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자지앙미옌이 전해진 시기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19세기말 조선과 청나라의 교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화춘을 처음 만든 우희광은 중국 산동성에서 1886년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청국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아 각종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고 있었으며 치안은 무척 불안정하여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조선은 임오군란 이후 우세해진 정치적 세력을 배경으로 청은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함으로써 화교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에 의한 인천항을 1882년에 개항하였다. 이런 조선의 정치적 상황 외에도 중국 내의 여러 사건이 화교를 조선으로 이동하도록 유인하였다.

당시 조선의 인천 선린동 지역에는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형성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청국과 거리가 가까워 적지 않은 산동성 사람들이 인천으로 이주하여 무역을 하며 생활을 영위하였다. 우희광은 인천으로 이주하여 산동성 상인들의 동향회관인 산동회관을 설립하였다.

1913년 산동회관은 공화춘으로 이름이 변경되고 산동요리 위주의 ‘중식찬관’(中式餐館)을 운영하게 되는데 이 찬관의 명칭을 공화춘이라 하였다. 공화춘은 국부 손문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세웠기 때문에 우희광은 국가의 경사스러운 일을 경축하기 위하여 ‘공화국적춘천도료’(共和國的春天到了: 공화국의 봄이 왔다)는 의미를 가진 공화춘을 찬관의 이름으로 취했던 것이다.

자장면은 허베이, 산동산시와 동북 3성 농민들이 많이 먹었던 국수다. 이처럼 북방의 대표 국수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즐겼던 음식이지만 정작 중국의 문헌에서는 자장면에 대한 용어를 찾아보기 어려우며 자장면과 유사한 음식에 대한 기록만 남아 있다. 중국 근대 문학가 루쉰(魯迅)의 고사신편(故事新編)에 “식탁에 야식을 내왔는데 한편에는 큰 국수(白麵)그릇을 놓고 다른 한편에는 오리고기를 넣고 볶은 자장(作醬)그릇을 놓았다”고 묘사한 기록이 있다.

한때 자장면이 ‘중국음식이다 아니다’하며 논쟁이 벌어진 일화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중국에도 자장면은 있다’였다. 그러지만 그 맛은 우리의 짜장면과는 상당부분 다르다. 중국의 작장면 맛은 짜고 느끼하며 단맛도 미미하다. 짜장면은 국내 화교들이 창안해 만든 사실상 ‘현지화된 한국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성호 김포대학교 호텔조리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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