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韓ㆍ中의 아물 수 없는 트라우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7월 3일 이틀 일정의 방한은 우리 국민의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았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지근거리인 데도 심정적으로 멀게만 느껴졌지만, 한ㆍ중 정상회담 뒤에 일각에선 한국입장을 지지해준 낯설지 않는 이웃으로 성큼 다가선 느낌이 든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실제로 현대사에서 일본으로부터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는 한국과 중국이다. 따라서 동병상련의 ‘과거사’를 공통적으로 안고 있기에 곧 공감대가 형성되고 소통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일까. 추락하던 박근혜 대통령인기가 껑충 뛰었다. 분명 국민들이 지지하고 환영한 결과였다. 사실상 아픈 역사문제를 진정성 있는 사죄 한마디 없이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게 한ㆍ중의 국민정서다. 아베신조는 조상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을 왜곡하는 등 수정주의로 일관해 왔다. 한편 국제적 관심 속에 두 정상들이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과시함에 따라 같은 날, 아베정부는 시샘이라도 하듯 곧바로 대북제재를 일부 해제했다. 이에 미국도 이해한다고 나섰다.

알다시피 북ㆍ일 사이가 ‘견원지간’처럼 불편했는데 급속히 뜨거워지고 있다. 이래서 국제관계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걸까. 이제 한국은 조선(朝鮮) 후기처럼 나약하지 않다. 국익을 위해서는 적극주도해갈 역량을 갖췄다. 따라서 강대국의 정책에 의해 끌려 다닌 약소국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보여준, 박대통령의 의지와 리더십은 한층 돋보였고 믿음직스럽다.

돌이켜보면 한반도를 병탄하고 중국 국토의 절반을 강점해 양국이 큰 고난을 겪었다.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은 독립 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국권을 찾고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특히 외교권이 박탈되어 조선이 합병된 시기(1905~1910)에 분기탱천한 조선청년들이 일본과 싸우겠다고 나섰다가 일본군의 의병토벌로 인해 전국의병 15만 명이 사망하고 잡혀서 냉혹하게 살육을 당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1593년 4월 1년 만에 한양을 수복했을 시, 거리마다 인마 썩은 냄새가 천지에 진동했고, 뼈들이 짚단처럼 흩어져 생지옥이 따로 없다”고 임진왜란의 참상을 기록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남경 학살사건 때 35만 명의 양민을 총살, 생매장, 불태워서 잔인하게 죽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청일전쟁과 중일전쟁 때도 수많은 양민을 처참하게 죽였다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희생자들 사진 등에서 일군의 야만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처럼 한중은 일제침략의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다. 일본은 피해국민의 가슴에 못질을 하고 있다.

또 몇 년 지나면 생을 마감할 동남아 등, 위안부 할머니의 처절한 외침에도 귀를 막고 있지 않는가. 어디 그뿐만 아니다 독도는 일본고유의 영토다. 중국의 댜오위다오(일본명 센가쿠)도 자국 것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주변국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두 섬은 옛 문헌자료가 증명하고 있음에도 억지와 생떼를 쓰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아베 정부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일제의 전쟁범죄가 면죄부를 받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한ㆍ중정상회담’ 이틀 전, 일본 아베신조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할 수 있게 헌법해석을 각의서 결정했다. 일본이 패망 이후 지켜온 ‘전수방위 원칙’을 휴지처럼 버리고 ‘전쟁할 수 없는 나라’에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와 관련 동남아 국가들은 우려속에 안보 환경이 더욱 미묘해지고 긴장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 한국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굳건한 안보의 토대위에 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이 있길 소망한다.

박정필 시인ㆍ수필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