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밀레니엄 축포가 변해 빗발치는 포성과 화염 가득한 전장이 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분명 잔인한 4월 그 자체였다. 군수산업의 획기적 발전으로 민간인 1천만명 이상이 희생된 주검으로 가득한 전장은 천재시인 T.S. 엘리엇의 눈에 ‘황무지’보다 처절했다.
4월은 우리 근대사에서도 유독 진통이 많았던 달이다. 가깝게는 세월호 침몰까지. 모름지기 아픔들을 한 어깨씩 나눠지고 지나가는 계절이 이달이다. 인동초처럼 혹한은 기꺼이 희망을 선사하고야 마는 걸 보면 아픔은 분명 성숙의 전령이다.
4월이 잔인할수록 5월은 더욱 아름답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어대야 하고, 계절의 여왕은 시체들을 짓밟고서야 화려한 손짓을 하는 것이 삼라만상의 이치인 듯하다.
그렇다면, 혹한을 끝까지 버티려는 필사의 시도까지도 철저히 좌절시켜야 진정한 4월의 제 모습이다. 그렇게 처절한 엔트로피(해체)과정을 거치면서 고통 속에 새 생명은 잉태된 후에야 축복 속에 새 생명이 세상과 만나게 된다.
잉태의 시련과 고난의 시간을 오롯이 헌신한 후에야 새 생명은 제 잘난 듯 얄밉게 뽐내는 걸 보면 모름지기 그것이 생명체의 운명인 것 같다. 온 세상에 그린 재킷을 입히는 엽록소도 수많은 유기체의 헌신에 빚을 진 것이며, 자연휴양림이 엄동설한을 잘 견뎌준 덕분에 매년 1천2백만명을 넘는 인원이 산을 찾는다.
언 땅과 나무의 각질을 뚫고 소리없이 올라오는 새 생명을 보며 나를 감싸고 있는 생태계의 사슬을 확인하게 되는 계절이 4월이다. 생각해보면 모두에게 감사할 일뿐이다. 헌신의 가치와 인내의 의미를 배우면서 차츰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깨닫게 하는 것도 신의 한 수인 것 같다.
이때쯤 ‘내려놓음’을 생각하게 된다. ‘내려놓기’란 고상하고 점잖은 표현이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남에게 쉽사리 권해서도 안 될 일이다.
사람은 욕망으로 똘똘 뭉친 덩어리라 가질수록 더 가지려 한다. 더 먹고 더 취하며 더 즐기려 하면서도 더 건강하기를 바란다. 더 가지고 더 넓힌 후에도 이젠 남의 호주머니까지 넘본다. 이런 욕망은 자본주의에 그대로 접목되었고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끝없이 진화하고 있다. 동물적 본능 말이다.
욕망에 찌든 사람들은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흥분하거나 좌절하고 인생을 버리게 된다. 많이 잃고 난 후에야 세상에 있는 대다수 것들은 사실 나보다 수명이 길 뿐 아니라 결국 최종 소유자가 나 혼자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실패도 맛봐야 저 밑바닥 삶을 이해할 수 있고 올라가는 사다리가 정말 중요함을 배우게 되고 정상의 희열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욕망의 이면은 열정이다. 열정은 ‘참가치’에 잘 길들여지면 정의를 향해 돌진하는 원동력이 된다. 21세기 문명의 이기와 성장의 혜택은 그 와중에 맺어진 열매이다. 이상적인 세상을 논하자면 그 열정의 사회화와 제도화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사월은 가고 오월이 왔다. 4월은 평등하게 주어진 인고의 시간이다.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이 시간이 누군가에겐 더 없이 가혹한 시간이겠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보내고 싶지 않은 날들일 수 있다. 꿈과 소망과 희망을 거두지 말자. 4월의 비밀을 아는 이들은 지금 어쩌면 설렘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아픈 4월이 잉태한 내일은 항상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헌신과 희생, 인내와 이해를 자양분으로 자라는 계절의 여왕은 뒷날 늘 화려한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세상의 달력엔 내년에도 4월이 반드시 오겠지만 인생의 여정엔 벌써 한해 지난 2016년의 4월이다. 안타깝게도 인생에 주어진 2015년 4월은 꼭 한번뿐이다. 잔인하게 아픈 시간도 그냥 보낼 수 없는 이유이다.
명정식 농협안성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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