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이루어진다.
10월 20일~26일 금강산에서 모두 7일간 2박3일씩 1, 2차로 나뉘어 진행된다고 한다.
이번에도 한적(韓赤)은 신청자 중 생존자를 대상으로 상봉 인원의 5배수를 뽑아 상봉 의사와 건강상태 등을 확인해 2배수 가량으로 압축한 뒤 북측과 생사확인 의뢰서를 교환했다고 한다. 몇 명이나 상봉을 할까? 제대로 상봉이 이루어지기는 할까? 무슨 핑계가 또 끼어들지는 않을까.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지금까지 19차례나 만남을 가졌지만 횟수를 거듭하면서 이런저런 사건들로 인해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해 오느라 상봉 인원은 채 2천명을 넘지 못한다. 상봉신청 등록 이산가족이 2006년 12만 5천여 명이었고 지난 7월 현재 6만 3천여 명으로 그동안 절반가량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상봉행사가 정례화 돼 매달 100명씩이 만난다고 해도 신청자 중 남아있는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만나려면 55년이 걸린다고 하니 이건 상봉이 아니라 그냥 ‘상봉 행사’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는 ‘이산가족 상봉’ 소식만 듣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아버지 형제가 10분이나, 어머니 형제가 4분이나 북한에 사셨는데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상봉 신청을 한 적이 없고, 그 쪽에서 찾은 적도 없었다.
1985년인가 처음 이산가족이 남북을 오가고, 그 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받는다고 했을 때 나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 놈들 못 믿어!” 그 이후 19차례 이산상봉, 7차례 화상 상봉이 진행돼도 일언반구 말이 없으셨다.
어머니인들 왜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없으셨을까. 가족들 얘기를 들려줄 때면 늘 목소리가 떨렸고, 말이 끊겼고 눈물을 보이곤 했었다. 6.25가 터지고 공산당 치하에서 어머니는 남편과 큰 아들을 남한으로 몰래 빼돌렸다가 어깨가 빠지고 팔이 부러지는 모진 고문을 당했었다.
며칠 전 모 신문의 ‘한신(韓迅) 선생’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올리곤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그는 함흥 출신으로 9형제의 둘째, 남자로는 첫째로 3달을 기약하고 떠밀려 트럭에 올려 진채 ‘흥남 철수작전’ 피란민 대열 속에 있었다. 그리고 65년을 가족을 그리워하며, 가족을 떠나 피란 나온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다가 지난 4월 타계했단다.
가족에 관한 그리움을 ‘절규’한 시집을 9권이나 낸 시인이면서 19번 진행된 이산상봉에 한 차례도 신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죽어도 다시는 그런 이별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산 상봉이라는 게 정해진 절차에 따라 몇 시간 만나보곤 평생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에 다름 아니냐는 것이다. 이건 가족과의 만남이 아니라 다시 생이별을 시키는 짓 아니냐고 양쪽 당국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절규를 한 것이다.
천안함 사태로 5.24 조치가 취해지고, 박왕자씨 사건으로 금강산 관광이 끊겼는데도 개성공단은 이어지면서 이산가족 상봉은 왜 중단돼야 하나. 이산가족 상봉을 약속해 놓고도 로켓 발사니, 대북전단 살포니 갖가지 핑계로 무산된 게 몇 번인가. 남한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북한의 선심에 매달리는 모습 같아 가슴에 울화가 치민다. 이게 성과와 선심의 문제인가.
상봉 규모 확대, 정례화, 상시화, 편지교환과 화상 상봉에 노력했으면 지금쯤 상호 왕래와 통일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인륜’을 정치 무대에 올려놓고 장난질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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