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1927∼2015), 大道無門의 길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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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장으로 26일 현충원 안장

 

‘군정 종식에 종지부를 찟고 문민시대를 연 민주화의 별이 사라지다.’

 

민주화 운동의 거목으로 대한민국 격변기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향년 88세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0시22분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일 고열과 호흡곤란 증상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다가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옮겨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악화해 결국 영면했다.

암울했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하며 파란만장한 격동기의 삶을 보내온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최다선 의원으로 서슬이 퍼런 군부정권에 당당히 맞서 대항한 민주화 지도자로서 숱한 정치적 역경을 극복해 왔다.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출생한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돼 제 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최연소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장택상 전 국회부의장의 비서로 발탁돼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 3선 개헌 저지의 선봉에 서면서 30여년의 순탄치 않은 야당 정치역로에 발을 내딛게 된다.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면서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야권의 세대교체를 이끌어냈으며 유신체제에 맞서 항거하면서 유신체제의 종식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민주화의 서광이 밝아오기도 전에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체제의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에 처해지는 등 정치적 고난의 길을 걸었다.

 

신민당 총재 시절 유신정권에 맞서다 총재 직무정지와 의원직을 제명당했으며 당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정치적 탄압을 받던 자신의 처지와 저항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이후 정치적으로 극심한 부침을 겪다 지난 1992년 대선에서 평생 라이벌인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군정 종식’을 이뤄내며 ‘문민시대’를 열었다.

 

문민정부의 국정 기조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부패척결 등이며 특히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제기되자 5·18 특별법 제정을 직접 지시,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한 것이 대표적이다.

 

신군부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함으로써 민주화의 거두로서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잘 보여줬고 상해 임시정부 청사와 경복궁을 복원하는 등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국정운영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집권 초반 정치권과 사회지도층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작업을 통해 부도덕한 사회지도층을 단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치적을 쌓았고, 군부정권의 잔재인 하나회 척결을 통해 문민정부의 정통성 확보에 공을 들였다.

 

1993년 금융 및 부동산실명제의 전격 도입으로 부정부패 및 부조리 등의 온상을 제거하는 등 경제분야의 투명성 확보와 시스템 개선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고, 1995년 민선 지방자치제 시행으로 중앙집권적 정부 권한을 지자체로 상당 부분 이임하는 등 권력 분점에도 집중했다.

다만 집권 후반 불거진 친인척 비리와 경제정책 실패로 외환위기(IMF)사태를 초래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한편 정부는 22일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오는 26일 치르기로 했다. 국가장법에 따라 장례위원회가 설치되며 위원장은 관례대로 황교안 국무총리가 맡는다.

 

강해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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