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시해와 단발령,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전대미문의 혼돈 속에서 문석봉·유인석·김하락·노응규·이춘영·김복한·이소응·민용호 등 의병들이 전국 팔도에서 봉기하였다. 주로 유생층이 중심이 된 이들은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정부를 비겁하게 여겼고, 오백 년 동안 조상들이 아름답게 길러온 의리(義理)를 지키려는 사명감에 불탔다. 그러나 2월 18일 고종은 의병해산을 명령한다.
고종의 뜻을 받든 내부대신 박정양의 훈시에 의하면, 단발은 강제가 아니었으므로 의병봉기의 명분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러나 단발이 강제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거짓말이었다. 조선정부는 터무니없는 거짓말과 함께 일본군의 수족이 되어 의병을 폭도로 몰면서 탄압하였다.
아관파천 중이던 고종은 1894년 4월 한 달 동안에만 러시아에게 경원·경성 광산채굴권, 미국에게 운산 광산채굴권, 독일에게 당현 금광채굴권을 양여하였다. 고종은 열강의 세력균형 속에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고, 열강에 대한 선심성 이권의 양여를 남발하여 국부를 유출시켰다.
이때 만약 고종이 죽을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팔도에 조칙을 내려 근왕병을 모으고 의병을 적극 후원하였으면 어땠을까? ‘의병전(義兵傳)’의 저자 뒤바보는 고종이 결심만 했더라면, 본디 조선백성들은 정의감이 강하기에, 임진왜란 때보다 몇 배 더한 참화를 당하더라도 반드시 일제를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때로부터 두 갑자가 지났지만, 지금도 우리의 운명은 여전히 풍전등화(風前燈火)격이다. 국부를 탕진하면서도 자신의 안일만을 도모하는 정치가보다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구할 대 정치가가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박성순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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