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 ‘그림옷’… 구불구불 길따라 웃음소리 커졌다
골목 입구부터 선명한 색감의 벽화가 좁은 골목길을 비추는 듯 했다. 30도가 넘는 더운 날씨에도 한 커플은 셀카봉에 휴대폰을 끼워 벽화골목 입구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한창이었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자 ‘사랑하다 길’과 ‘처음아침 길’ 갈래가 나왔다. 각각 길 시작점에 있는 사랑의 자물쇠를 거는 담벼락과 날개 단 아이들이 인도하는 듯한 그림이 이쪽으로 걸어오라고 손짓했다. 벽화 뿐만 아니라 담벼락에 붙은 고양이 모양의 설치물이나 구석에 서있는 도깨비 등도 눈을 즐겁게 했다. ‘행복하 길’, ‘숨어있기좋은 길’, ‘뒤로가는 길’ 등 골목마다 재미난 이름도 붙였다.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은 70~80년대 가옥과 골목길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작은 마당과 슬레이트나 기와 지붕을 가진 1층짜리 주택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사이를 골목길이 구불구불 가르고 있다. 하나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회색빛 마을이 알록달록한 색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는 것이다.
행궁동 벽화골목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시청 등 행정기관이나 기업의 후원이 아니라 마을 안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이다. 행궁동은 2010년 대안공간눈에서 진행한 ‘이웃과 공감하는 예술 프로젝트 행궁동 사람들’이란 프로젝트로 시작됐고, 벽화골목으로 거듭났다. 이윤숙 대안공간눈 대표는 행궁동 시아버지 집에 80년대에 들어오면서 행궁동 주민이 됐다.
그러나 1997년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지자체가 성곽복원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안의 주민들의 주거와 삶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씨는 골목의 역사와 사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행궁동 벽화골목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주민들도 참여해 함께 마을을 바꿔나갔다.
주민들은 작가와 집 담벼락에 그릴 그림을 상의하기도 하고 직접 붓을 들고 벽화에 칠을 하기도 했다. 외국 작가들도 행궁동 골목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행궁동 벽화골목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북수동 경로당 담벼락에 그려진 하늘색 바탕의 잠자리와 각종 꽃들은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붓을 들고 칠했다.
브라질 출신 라켈 셈브리 작가는 금보여인숙 담벼락에 황금물고기를 그렸다. 주인장이 직접 쓴 금보여인숙 간판과 검정색 기와에 감명받아 간판은 지느러미로 기와는 물고기 비닐로 형상화했다.
행궁동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K씨(73)는 “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벽화가 칠해지고 난 뒤 이곳을 찾는 젊은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면서 “가끔 예전에 두부장사가 종을 흔들면서 지나가거나 골목길 어귀에서 자식들 귀가를 기다리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고 말했다. 40년 넘게 이곳에서 생활한 P씨(80)도 “20~30년 전에는 아이들이 공도 차고 고무줄놀이도 하면서 골목이 시끌시끌했는데...”라고 과거를 회상했다.
안양시에도 숨은 벽화길이 있다. KTX경부선을 가로지르는 박달로를 차로 달리다보면 호현삼거리에서 200여m 못 간 지점에 공장단지 왼쪽으로 자그마한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다시 300여m 구불구불 올라가면 박달2동 끝자락에 위치한 주민 이백 여명 남짓 사는 호현마을이 나온다.
강렬한 색감의 벽화로 꾸며진 여느 벽화골목과 달리 이곳 호현마을 동동길은 연보라색과 에메랄드색, 노란색 등 파스텔톤으로 칠해져 한층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벽화가 빽빽한 담장이 아닌 파스텔톤 배경에 ‘웃어요’, ‘사랑합니다.라고 말해보세요’ 등 짧은 문구나 간단한 그림으로 여백의 미를 살린 것이 인상적이다.
호현마을 동동길의 테마는 ‘건강’이다. 호현마을 주민들은 대다수가 고령으로 이곳에서 30~40년 이상 거주했다. 마을은 사회건강길과 정신건강길, 신체건강길 등 세 개의 테마로 이뤄져있다. 호현마을 동동길 프로젝트는 지난 2014년 경기도 생활환경복지마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안양시와 호현마을주민협의회, 공공미술 프리즘이 힘을 모았다.
노인정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벽화를 칠하고 나서 칙칙했던 마을 분위기가 훨씬 밝아져 쭈글쭈글했던 마음까지 곧게 펴지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한 할머니는 “외지에서 애들 데리고 와서 벽화에서 사진찍고 가는 젊은 사람들도 있다”며 벽화골목길에 대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유선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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