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8월12일 괌에서 진도 7.9 정도의 강진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 휴가차 방문한 괌에서 처와 묵었던 숙소는 36층짜리 PIC호텔이었다. 5층 객실에서 쉬던 중 갑자기 ‘쿵쿵..’하는 진동소리와 함께 전기가 끊기고 스프링클러가 터지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요동치는 건물 속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냉장고가 뒤집히는 등 생지옥이었다. 호텔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체감으로 느끼기에는 5분 정도는 족히 되리라 싶었는데 실은 약 1~2분 정도 그렇게 건물이 요동쳤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좌우로 너울거렸던 호텔건물이 멀쩡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우리는 살 수 있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환태평양지구대에 속한 괌은 일찍부터 철저하게 시행한 내진설계 덕분이었다고 한다.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릴 듯한 기세의 강진 속에서 요동은 쳤을망정 건재한 고층 호텔. 이를 직접 목도하였기에 내진설계야말로 지진대책의 중요한 첫 발걸음이라고 감히 말씀드린다. 경주 지진을 계기로 내진설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허나 용두사미로 끝나서는 안 된다. 엄격한 내진설계만이 거대한 지진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3층 이상, 500㎡ 이상 건축물에 대해 내진설계를 의무화한 건축관련 규정의 보완과 함께 내진설계 제도의 확실한 정착이 절실히 요구된다. 기존 건물에 대한 안전대책과 함께.
괌에서의 지진경험은 또 하나의 불편한 추억(?)을 선명히 남겼다. 지진공포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것이다. 맞닥뜨린 지진 앞에서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 절박한 순간 ‘아!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외마디 외침 속에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일 외에는 말이다. 그 순간의 공포는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불안해지는 현상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여행을 통한 아름다운 추억 대신 지진이 만들어낸 트라우마가 이를 대신한 것이다. 그 후 한동안 위층에서 ‘쿵쿵’하는 진동, 영화관 같은 밀폐된 공간, 심지어 건강검진을 위한 MRI 촬영조차도 공포스러웠다.
트라우마는 치유가 중요하다. 공포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경주 지진으로 인하여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분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전문가들의 조언하에 적극적 치료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천재지변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지진에 대비한 유비무환의 노력, 후유증을 겪는 분들에 대한 치유는 우리가 할 몫이다. 다시 한 번 경주 재난지역의 재건과 치유를 기원드린다.
박요찬
경기도 고문 변호사ㆍ세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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