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잘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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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양궁시합장이다. 한 선수가 예선전에서 모든 화살을 과녁 정중앙에 맞추었다. 단 일 센티의 오차도 없는 백발백중! 신문방송이 난리가 났다. 왜? 너무 잘 쏴서? 그렇지 않다. 잘 쏘고 탈락했기 때문이다. 다른 선수의 과녁을 쏘았다.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헬라어 원어는 ‘하마르티아(hamartia)’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동시에 죄를 의미한다. 죄는 잘못된 과녁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근 국정농단을 포함한 인간의 범죄는 모두 동일하다. 그것은 존엄성에 대한 훼손이고, 자기 이익을 위해 상대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며, 이는 곧 인간을 사물로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타인을 향한 죄에는 자신을 향한 죄가 선재되어 있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과녁을 잘못 선택하는 것이다. 인생엔 두 가지 과녁이 있다. 하나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것처럼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것들이고, 다른 하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선택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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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위해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위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 권력욕으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한 이를 기회 삼아, 역시 ‘권력에의 의지’에 중독된 자칭 정의의 사도들이 광명한 천사의 얼굴들로 난리가 아니다.

하지만 정의의 사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사도들이 넘쳐나는 것이 문제이다. 안타깝지만 개인은 정의를 원할 수도 실현할 수도 없다. 개인의 본성에 내재된, 하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는 권력욕과, 사회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서의 정의는 공존 불가능하다.

마이클 샌델의 고민처럼 ‘정의란 무엇인가’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정의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불의하다.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정의는 개인의 권력과 다른 과녁이다. 

양다리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국민이 개인에게 전권을 주고 정의를 실현해달라고 소망하는 것처럼 자기파멸적인 논리는 없다. 권력은 개인과 분리되어 별도의 구조로 존재해야 한다.

 

최근 광명의 천사들 중 몇이 중도 하차했다고 한다. 속내야 어떻든 그래도 본인이나 사회를 위해 잘한 일이다.

 

김봉규 미래행복인재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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