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에 한국인들은 지구촌의 다른 이들과 동일한 고민을 갖고 있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잡기 힘든 ‘시간적 분할’의 스트레스를 세계인들과 함께 겪는다.
이데올로기의 경우, 한국은 특수한 상황으로 분할돼 있다. 레닌은 이미 1921년에 자기 자신이 만든 러시아의 관료제도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테크노크러시(Technocracy, 기술에 의한 지배)와 행정관료(Bureaucracy)는 노동자계급의 적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나 애덤스미스 학파의 주장과 달리 노동자나 자본가가 아니라 제3의 권력자, 정치인(통합자)들이라는 게 엘빈 토플러(1928~2016)의 주장이다.
이 같은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해소 상황과는 별개로 한국사회는 진보와 보수를 나눌 때 마르크스 주의를 중심으로 한 냉전 이데올로기를 우선 적용한다. ‘공개’와 ‘참여’의 문제는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측에서는 각각 “4차산업혁명에서 ‘공개’와 ‘참여’의 역할은 우리 진영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는 혼돈을 겪는다. 분단국가의 현실은 세계적인 이데올로기 종식의 시기에도 좌우익 분할의 혼란을 느끼게 한다.
지구촌이 느끼는 ‘시간적 분할’의 경험에 대해 말해 보자. 과학문명의 발전에 따라 제3의물결과 제3차산업혁명(정보화), 제4차산업혁명(인공지능, 드론, 로봇 등)이 진행되면서 문화적인 지체현상을 겪고 있다. 지체현상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때로는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인의 농업인구는 2017년도에 전체인구의 4.7%인 247만명이다. 한국인 대부분은 산업화된 크고 작은 도시사회에 살고 있다. 그들은 197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5개년계획들과 함께 산업의 역군으로 성장한 50대 이상의 연령들이다. 1개 교실에 60명 이상 공부하는 대중교육에 의해 성장했다. 농업에 대해서는 어릴 적 경험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농촌에서 벗어나 공단조성과 기계화 속에서 한국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빈곤과 기아를 극복한 삶을 영위했다.
이보다 조금 더 나이가 어린 40대의 경우, 최근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나온 세대들이다. 도시에서 성장한 이들은 농촌생활을 모르기 쉽다.
40대나 60대나 모두 자신을 ‘현대인’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어느 순간 자신은 ‘옛날 방식’의 존재가 되고 있었다.
현재 30대 이하 수백만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이미 미래의 생활방식에 따라 살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그들은 도시 한복판에서 미래의 한국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인들 중 선발대이며 지금 탄생 중에 있는 제4차 산업혁명기의 최초의 성인, 미래인이라 할 것이다. ‘보다 빠른 생활’을 하고 있는 존재다.
이들 젊은이들이 항상 옳다면, 40대 이상의 현대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머지않은 미래에 로봇이 SNS를 하며 국민여론을 형성하는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때 지금의 20대는 옛날 방식의 어른이 되어 있을까? 인류의 미래가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이데올로기와 시간분할’이라는 상이한 고민을 해보았다.
김신호 인천본사 경제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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