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다양성의 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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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듣고 말썽만 부리는 아들에게 엄마가 말했다. “아들아!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단다!” “누군데요?”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사람, 엄마 말 안 듣는 나~쁜 사람! 아들은 어떤 사람 되고 싶을까?” 지금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도 돼지 나폴레옹 한 마리가 터진 입이라고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 말 들을래 안 들을래!” 엄마와 김정은의 차이는 분명하다.

후자는 시체도 찾을 수 없이 난도질을 해버린다. 우리나라도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억압하던 시절이 있었다. 경제개발의 부작용임과 동시에 인간의 사욕이 섞여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를 북한과 동일한 독재라 부른다면 무식의 극치이니 대응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닫힌 사회였던 것은 사실이다.

 

흑백논리의 독단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대화를 겪은 대부분 국가들의 통상적 절차였다. 당연히 탈근대의 본질은 다양성이다. 수직적 구조의 닫힌사회에서 수평적 구조인 열린사회로의 전환은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한 행복추구권을 보장함으로 표현의 자유와 자아실현의 다양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제 국민은 국가의 통제를 거부하며 다양성을 억압하는 어떤 정책도 시대에 뒤떨어진 앙시앵 레짐의 산물로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다. 모든 현상에 양면성이 있으며 진리는 언제나 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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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의 이분법은 다양성을 거부하니 분명 독단이다. 그렇다고 다양성이 무조건 흑과 백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다시 다양성의 독단이 된다. 다양성이 백이 되고, 흑과 백의 주장이 흑이 되기 때문이다. 진리가 전체라면 참 다양성은 흑과 백을 포함한 전체이어야 한다. 

요즘 국정교과서 문제가 시끄럽다. 과거 정부가 획일적으로 교육을 강제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에 대한 알레르기는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정교과서라고 무조건 반대하는 작태는 다양성의 기초도 이해하지 못한 또 다른 형태의 독단이다. 분위기가 무서워 대부분 연구학교 지정을 철회한 마당에 전국 중고교 5천566곳 중 문명고 홀로 남아 전교조를 비롯한 독단의 협박에 저항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는 늘 그랬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갈팡질팡할 때 살아 있는 소수의 지성만이 안중근과 유관순 그리고 이순신 등 수 많은 참 애국자들처럼 촛불의 광기(光氣)가 광기(狂氣)로 전락하지 않도록 지켜왔고 횃불 되어 타오르게 했다. 문명고 김태동 교장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김봉규 미래행복인재연구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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