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볼레로, 색채를 덧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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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전음악의 전개 논리는 식물에 비유할 수 있다. 동기(motive)는 씨앗처럼 악곡의 특성을 담은 유전자를 품고 있다. 리듬이 줄기라면 화음은 잎이라고 할 수 있다. 동기가 전개되면서 연관된 음형들은 시간차를 두고 나열된다. 나무 가지가 자라나듯이 리듬이 변화하면서 확장하는 변주는 발전된 선율을 지어낸다. 이 선율의 화려한 움직임을 들으며 청중들은 악곡의 전개를 인식한다.

 

프랑스 작곡가 M. 라벨은 무용가 I. 루빈슈타인을 위해 무용 관현악곡<볼레로>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다른 곡들과 달리 선율전개나 리듬확장 같은 외형변화가 없다. 단순한 기초리듬 세포는 무려 169회 등장하며, 동일한 선율악절은 18회나 그저 반복된다. 현악 피치카토와 드럼으로 시작한 조용한 볼레로 리듬은 목관악기와 금관악기와 타악기를 차례로 태우고 열차처럼 달리다가 전 오케스트라가 합세하며 큰 음량으로 증폭된다.

 

M. 베자르는 점점 커지는 이 곡에 맞추어 빨간 원탁 위에서 무용수가 점차 격렬하게 춤을 추도록 안무를 했다. 홀로 추던 춤에 점점 무용수가 늘어나 피날레로 가면서 전 무용수가 춤을 춘다. 마지막에 무너지는 음향을 따라 전원이 무대에 몸을 던짐으로서 라벨 곡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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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리듬과 선율의 반복으로 구성된 이 음악에 라벨은 ‘음색의 변화’로 전개 논리를 세웠다. 악기의 첨가로 앞과 뒤 악절의 색채를 다르게 하여 리듬의 확대나 선율의 수식 없이도 악곡이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치 우리의 매일 일상이 비슷하나 같지 않음을 상징한다.

 

정부는 수질개선을 위해 4대강 보를 개문 방류하고, 메워 버린 자연습지 여과기능을 대신할 인공습지를 다시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잘 흐르던 강에 댐을 막은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숨이 끊어질 위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급하게 공사를 서둘렀던 이유가 아무런 명분도 갖지 못하게 되었고 파괴와 고통만 남았다. 남독일 프라이부르크에는 아주 맑은 개울 ‘드라이잠’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른다. 얕은 수심에도 팔뚝만한 송어들이 유영을 한다. 도심 개발로 개울을 훼손한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발전의 방법으로 부수고, 막고, 자르고, 뚫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원형이 훼손되면 복원이 아주 어렵다. 개발만이 성장이라는 외형 집착의 굴레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고유의 모습에 색채를 덧입히며 아름다운 감성을 채워 나가는 볼레로의 전개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주용수 작곡가·한국복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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