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벌새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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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즈음,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만을 가로지르며 리치먼드에서 산라파엘을 연결하는 다리의 확장공사를 2주간 중단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다리 끝에 서있는 나무를 꼭 베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그 나무에 벌새(Humming bird)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조그마한 둥지 안에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이 하나 들어 있었다. 벌새는 철새보호조약에 규정된 조류다. 공사지연으로 수백억의 손실이 예상되지만 부득이 공사를 중단해야 된다고 했다.

 

한 편의 동화다. 감수해야 할 손실이 너무 크기에 마음만 먹으면 둥지를 슬그머니 제거해 버릴 수도 있었다. 다른 나무로 옮겨놓을 수도 있었겠지만 벌새를 기준으로 결정한 점이 놀랍다. 새가 알을 까고 나와 날아가려면 시일이 사뭇 오래 걸린다. 어마어마한 공사의 규모나 예산 손실에 비해 벌새 알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닐 만큼 작다. 효율성만 놓고 보면 거의 제로에 가깝다.

 

작곡가 존 케이지(J.Cage)가 무대에 올린 <4분 33초>(1952)의 ‘침묵’은 얼핏 생산성이 없어 보인다. 273초 동안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그저 앉아서 시계만 바라보다가 끝마친다. 침묵의 도화지에 소음으로 채색한 셈이다. 아름다운 소리 요소들을 다 버리고 부질없어 보이는 소음과 정적에 그는 왜 그렇게 몰두했을까. 그의 구성은 세상에서 주목 받지 않는 존재들에 가치를 부여해 의미를 살려낸다. 모든 생명은 작든 적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케이지는 음향이 풍성한 음들을 멀리하고 부작위로 주어지는 우연한 음의 질서와 소외된 요소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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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문제를 대하는 정부의 방식이 너무 진부하다. 정부는 국민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는 운영자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도 머리 아픈 문제를 서둘러 해치우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피해자들의 편에서 고민하기보다 일본과의 관계를 더 고려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국가의 보호를 상실했던 할머니들은 자신의 안위를 스스로 지켜야 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할머니들은 자신들도 국가의 보호를 받는 존재임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여분의 삶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은 아주 무례할 뿐 아니라 할머니들에게 다시 폭력을 쓰는 꼴이 된다.

 

우리 조상들은 산길을 걸을 때 성긴 조직의 짚신으로 갈아 신었다고 한다. 개미가 밟혀도 크게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야만의 수레바퀴에 깔려 뭉개진 할머니들의 삶이 둥지 안의 벌새 알만도 못하다는 것인가. 존 케이지가 그토록 중요하게 다룬 소음과 침묵에서 ‘가치’에 대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

 

주용수 작곡가한국복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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