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화려한 포장과 내용의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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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설이나 추석 명절에 받는 선물을 보면 포장이 크고 화려한데 비해 정작 안의 내용은 부실하여 실망스러울 때가 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켜보면 가끔 명절 선물 세트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발표 자료도 멋지게 작성했고 발표자의 태도도 자신감이 넘치면서 또박또박 말도 잘 한다. 더구나 국어국문학과 학생답게 구사하는 어휘도 다른 전공의 학생들보다 어려운 한자어나 개념어, 전문어 등을 무리 없이 잘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생긴다. 

어려운 말을 구사하며 화려한 발표 자료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발표 내용을 내 말로, 내 생각으로 꾸려야 한다는 것을 놓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빌려와서 적당히 잘 꿰어 맞춘 것일 뿐이고 자신의 고유한 견해나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사람의 말로 발표를 하기 때문에 온전히 내용을 이해한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당연히 평가는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학회에서 토론을 하면서 같은 경우가 있었다. 학회는 연구자들이 자신의 견해나 주장을 논문으로 작성해서 발표하는 모임이다. 연구자가 발표한 논문에 대해 토론자는 논의의 타당성이나 유용성, 문제점, 의의 등을 짚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논문은 부족한 논리를 채우고 모순이나 표절 등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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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토론을 했던 논문이 학생의 발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구자는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온 연구자로 해외의 이론에 매우 조예가 깊었다. 해당 분야의 최신 논문들을 죽 나열하면서 영어 자료를 대상으로 한 이론에 따라 한국어 자료를 대입시켜 분석하였다.

충분히 가능한 논의로 해외의 연구 결과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어 자료를 분석하기에 그 이론들이 적당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한국어 예에 대한 설명은 부적절하거나 타당하지 않았다. 그저 해외 이론을 내가 이만큼이나 잘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TV 토론이나 광고,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후보자들은 자신이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최대한 많은 공약을 쏟아낸다. 그런데 그 공약(公約)이 명절에 받는 화려한 포장의 선물 세트는 아닐까, 그저 말잔치로 끝나는 발표는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매번 선거마다 속고 또 속지만, 이것도 해주겠다, 저것도 해주겠다는 후보들의 약속이 이번에는 꼭 지켜지는 진정성 있는, 책임질 수 있는 후보 자신의 말이길 간절하게 바란다.

 

이현희 안양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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