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당선_문재인이 걸어온 길] 盧의 동반자, ‘적폐청산·대통합 리더’로 청와대 입성

1.jpg
▲ 경남고등학교 시절 문재인 당선인, 대학 3학년 당시 법대 축제에서 만난 아내 김정숙씨, 동료와 함께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대통령 탄핵사태로 실시된 ‘5·9 장미 대선’에서 ‘재수생’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64)가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지난 2012년 대권 도전에 실패한 이후 ‘와신상담’한 그는 내공을 다져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우며 일찌감치 ‘대세론’을 형성, 마침내 대권을 거머쥐게 됐다. 특히 참여정부 민정수석ㆍ시민사회수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그가 당선되면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이후 1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됐다.

■ 어머니 연탄배달 돕던 소년…학창시절 ‘문제아’ 별명도

문재인은 지난 1953년 1월24일 경남 거제군 명진리의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함경도 흥남이 고향인 그의 부모가 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 때 자유를 찾아 남으로 오면서 정착한 곳이다.

 

이후 문재인은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북한 출신 피난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당시 영도는 대표적 서민 달동네로 일곱 살의 문재인 역시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 양동이를 든 채 긴 줄을 서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호남지역으로 장사를 나서며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연탄을 배달했다. 어머니의 연탄배달일을 돕던 그는 리어카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를 경험했다. 문재인은 당시 깨진 연탄이 아까워 발을 구르던 어머니의 모습을 서글프게 기억한다고 한다.

 

문재인은 가난에 좌절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다. 그는 부산 최고 명문인 경남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부유한 친구들을 보며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됐다. 이후 경남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도 공부만 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으며 고3 때는 술을 마시고 담배도 배웠다. 네 번에 걸쳐 정학을 당하는 과정에서 이름 탓에 ‘문제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대학시절 유신반대 시위 주도와 사시 합격

1972년 재수 끝에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문재인은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의 사형을 계기로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되고 만다. 이어 석방과 동시에 강제징집돼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서 군 생활을 했고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문재인은 제대 직후 복학의 길이 막혔고 대학졸업장이 없어 취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 부친의 사망을 겪은 문재인은 전남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고시공부에 매달렸고 1979년 사시 1차에 합격했다. 하지만 부마항쟁과 10·26, 12·12 쿠데타 등 혼란 국면에서 경희대 운동권 핵심이었던 문재인은 또다시 구속됐다. 그때 경찰서 유치장에서 문재인은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는다.

 

특전사 복무 시절의 문재인 당선인, 참여정부 당시 ‘정치적 동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특전사 복무 시절의 문재인 당선인, 참여정부 당시 ‘정치적 동지’ 노무현 전 대통령과.
■ 노무현과의 운명적 만남

사시 합격 이후 매월 봉급을 받게 되면서 난생처음 평탄한 생활을 하게 됐다. 이 무렵 7년간 연애해온 부인 김정숙씨와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고 조영해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전 대법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이귀남 전 법무장관, 고승덕 변호사 등 쟁쟁한 동기들 속에서도 문재인은 사법연수원 차석을 차지했다.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한 문재인은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 대형로펌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982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당초 동업자로 만났지만 삶의 동반자로 발전했다. ‘깨끗한 변호사’가 되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지역 노동인권사건을 담당하다보니 재야운동에까지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됐다. 1987년 6월 항쟁 때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부산 국본) 결성 시 노 변호사가 상임집행위원장, 그는 상임집행위원을 맡으며 부산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문재인은 노 변호사와 함께한 6월 항쟁의 기억이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일이었다고 한다.

 

■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대통령과 국정 운영

문재인은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 시민사회 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민정수석 시절 대통령 지근거리에서 국정 전반을 보좌하다 보니 격무에 시달렸다.

 

청와대 생활 1년 동안 무려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로 과로한 탓에 결국 민정수석을 사퇴,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귀국, 변호인단을 꾸렸다.

 

탄핵심판이 기각된 후에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했다가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지난 2007년 3월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아 노 전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참여정부와 함께 임기를 마친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의 사저인 김해 봉하마을 인근 양산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후 문재인은 이명박 정부 당시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의혹이 불거지자 변호인으로서 적극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노 전 대통령은 서거했다.

 

6.jpg
■ 정치입문과 대선도전, 그리고 재도전

지난 2012년 4·11 총선 때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된 문재인은 같은 해 치러진 18대 대선에 출마했다. 당시 안철수 후보와 어렵게 단일화를 이뤄내고 야권 단일 후보가 된 그는 48.02%라는 역대 야권 대선후보 최고 득표율에도 아쉽게 패배했다.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낸 문재인은 2014년 12월 당 대표에 출마했고 김종인 전 대표를 영입, 지난해 4·13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태’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됨에 따라 조기 대선 국면이 시작됐고 문재인은 적폐청산의 기수로 떠올랐다.

 

일찌감치 ‘대세론’을 형성한 문재인은 민주당 경선에서 누적 득표율 57.0%로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을 제치고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문재인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국민 대통합을 강조하기 위해 41회에 걸쳐 지역을 방문했고 13번 국토를 종단, 왕복하는 거리인 1만 600㎞를 누볐다. 특히 그는 60일 동안 전국에서 국민과 손을 잡으며 손등에 멍이 든 모습은 유권자들에게 진정성을 전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경쟁 후보들로부터 ‘불안한 안보관’에 대한 공세와 각종 네거티브에 시달렸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황교안 국무총리의 불출마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약진, 한때 ‘문재인-안철수 양강구도’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문재인은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유지했다. 이어 ‘1강(문 후보) 2중(안ㆍ홍 후보)’으로 흐른 막판 판세에서 문재인은 끝까지 대세론을 지키며 마침내 대권을 거머쥐었다.

 

■ 문재인이 꿈꾸는 새로운 대한민국

문재인은 선거 레이스에서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부정부패가 없고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몰상식이 상식이 되는 나라, 상식과 정상이 보편적 가치가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각오가 반영된 것이다.

 

그는 대선 과정에서 자신을 국민의 도구로 써 달라고 간청했다. 지금까지 국민을 도구로 권력을 누려왔던 특권정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적폐청산의 벽을 깨는 망치가 되고 정의로운 반석을 다지는 곡괭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문재인은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는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정의로운 통합을 이루겠다”며 “정의가 눈으로 보이고 소리로 들리며 피부로 느껴지는 사회,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고 성공할 때까지 도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송우일기자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