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종으로서 인간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도구를 끊임없이 개발하였다. 시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안경을 비롯하여 통신과 교통에 이르기까지 오감과 신체 능력을 극대화하는 발명품들은 인류를 더 강하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뇌 기능을 대신하는 최초의 계산기는 이미 1642년 당시 19세였던 프랑스 수학자 파스칼이 세금 공무원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개발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화두가 된 지금 인공지능이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이 될 것이며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이런저런 예측들을 내놓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람이 하는 일을 인공지능이 모두 빼앗아 갈 것이라는 걱정이 가장 많다. 지혜로운 존재인 인간만이 오직 할 수 있는 일들, 오랜 고민과 계산을 통해 준비하고 실현하던 일들을 인공지능이 쉽게 대신할까봐 두렵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류의 새로운 경쟁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지적 노동을 대신할 뿐 결코 감성을 가질 수 없다. 사람과 매우 유사한 로봇이라 하더라도 감정을 모방한 도구이자 유사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로봇은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지만 스스로 외로워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사람은 바둑의 승패에 따라 즐거워하거나 아쉬워하지만 인공지능은 오로지 계산하고 작동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놀이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영역이 되어야 하고 노동은 기계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 니체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어린 시절의 놀이와 예술성을 잃어버린다고 안타까워했다. 즉 현대를 사는 지혜로운 인간은 오직 노동을 위해 자신의 지혜로움을 사용해왔다. 누구나 가끔씩 스스로가 왜 이토록 바쁘고 억지스럽게 일하는지 되돌아본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면 짧은 내 인생의 주인의식이 부족한 것이고 무턱대고 놀기엔 무책임한 것인데, 인공지능이 우리 앞에 구원자처럼 나타났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1872~1945)는 ‘놀이하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놀이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시험을 보기 위한 과정도 아니다. 놀이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순수한 목적이며 인간의 진지한 관심사이다. 육상선수가 자동차보다 빨리 달리려고 하지 않고, 수학자가 계산기보다 정확하게 문제를 풀려고 애쓰지 않듯 인류는 인공지능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인류가 인공지능을 통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공정한 분배, 양보와 배려 등과 같은 윤리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공지능과 별개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기 위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요즘 앞다투어 강조하는 창의인재가 되려면 기능적 탁월함을 갖추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즐겁고 흥미로운 일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오재호
경기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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