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999+1, 경기도의 思想과 思想家] 21. 조선 사상계의 대표 지성, 서계 박세당

사드, 명분인가? 실리인가? 300여년전 사상가가 우리에게 묻다

박세당 묘지
박세당 묘지
사드를 설치하느냐 마느냐.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긴장수위가 심상치 않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부상하는 신흥국과 기존 패권국간의 충돌로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는 패턴을 보여 왔다. 17세기 역시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동아시아 질서의 패자로 부상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패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서계(西溪) 박세당(1629~1703)은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병자호란(1636)을 겪는다.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아버지(박정)와는 4살 때 사별하고 난리가 나자 어머니를 따라 원주, 청풍, 안동 등으로 이리저리 피난했고 호란이 끝난 후에도 청주와 천안 등지를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13살이 되어서야 고모부 정사무(鄭思武)로부터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나약한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관직에 진출(33세)하는 듯했으나 주자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주자학적 중화주의와 정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벼슬을 버리고 수락산 기슭으로 낙향한다. 불과 8년여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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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해버린 명나라 숭배 ‘이상한 나라 조선’

서계는 낙향한 뒤 청나라의 황금기가 시작되는 강희 7년(1668)에 서장관으로 연경을 방문해 청나라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돌아온다. 이때 사행길의 책임자였던 동지정사 이경억은 현종에게 청나라에서 듣고 본 것을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번 저들의 사치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이미 전쟁도 없고 땅을 남쪽 끝까지 얻어서 물화(物貨)가 집중돼 편안히 부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용하는 기물은 화려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망할 조짐이 아닙니다”(현종실록) 라고.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춘추대의를 앞세우고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해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를 숭배하는 명분론적 역사인식에 매달려 있었다. 병자호란으로 강토가 유린되고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三拜九叩頭) 치욕을 겪으면서 60여만 명의 백성들이 심양으로 끌려가 노예시장에 팔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국가의 존망과 백성의 안위보다는 공자-맹자-주자-정몽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의 역사만을 중요시했다.

 

■ 민생에 이롭다면… 사상의 장벽을 허물다

서계는 “날로 퇴폐되어 가는 세상을 가히 바로 잡아 구할 수 없어” 석촌동으로 은거는 하였지만 ‘먼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여기에서부터’(行遠必自邇) 시작해야 한다고 자각했다. 그리고 몸소 땀 흘려 농사를 지으며 <색경穡經>을 짓는다. 

<색경> 서문에는 “누구든 곡식과 채소 가꾸기를 배우려면 스승을 찾아야 하는데 경험 많은 농부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하에서 농사의 최고 스승이 바로 경험 많은 농부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주자학적 사유와는 거리가 멀다. 

직업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도는 같다고(異業同道) 외쳤던 양명학적 사유가 짙게 배어 있다. 그만큼 서계는 민생에 이로운 것이라면 그 어떤 사상에도 개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단시하고 있던 노자 도덕경과 장자(莊子)까지도 정사(政事)에 쓸모가 있다고 판단하여 과감히 주해한 것이 이를 잘 드러낸다.

박세당 고택
박세당 고택

■ 청나라와 싸울 것인가 화의할 것인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울 것인가 화의(和議)할 것인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 지천 최명길(1586~1647)은 화의를 주장한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청음, 동계와 삼학사 등은 절의(節義)를 주장하고 최명길은 화의를 주장했는데… 최명길은 이(利)를 취해 의(義)를 저버린 사람임을 면하기 어렵다”(宋子大全)고 평가한다. 

우암의 시각으로는 사직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절의를 주장한 청음 김상헌과 삼학사 등은 의(義)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조선과 조선 백성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한 최명길은 ‘명나라에 대한 대의’를 배신한 인물일 뿐이다. 서계의 입장은 우암과는 정반대이다. 

서계는 “무너지는 사직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운 생민(生民)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잠자리를 편안히 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 입었으면서도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도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西溪全書) 최명길의 화의는 그저 그럴듯한 ‘명분’이나 ‘말’이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국가와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공업(功業)’이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그 공도 모르고 우암이 그를 헐뜯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 삼전도비문 쓴 백헌 이경석 ‘구사일생’

백헌 이경석(1595~1671)은 인조의 부탁으로 삼전도비문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이 행위 역시 도통론적 시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서계가 낙향한 바로 그 해 1668년 백헌이 현종으로부터 궤장(원로대신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왕이 의자와 지팡이 하사)을 받을 때 우암은 ‘수이강(壽而康)’ 즉 오래 살며 강건하다는 글로 백헌을 축하한다. 

하지만 이 글은 송나라 흠종과 함께 금나라에 잡혀가 항복문서를 쓰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부귀를 누렸던 중국의 역적으로 악명 높은 손적(孫)에 비유한 말이었다. 우암은 백헌이 ‘조선판 손적’이 아니고 누구냐 라고 비꼬았던 것이다. 

궤산정 : 박세당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
궤산정 : 박세당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
이뿐만이 아니었다. 효종 때 김자점이 조선이 성곽을 보수하는 등 북벌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청나라에 밀고하자 청나라에서 북벌계획의 전말을 조사차 사문사(査問使)를 파견한 적이 있었다. 조정이 큰 위기를 맞았다. 

이때 백헌은 “이 모든 일은 내가 주관한 일이오” “우리 임금은 전혀 모르는 일이며 모두 영의정인 내가 시킨 것이오” 하며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청나라는 “대국을 속인 죄”라고 하며 백헌을 극형에 처하려 한다. 

백헌은 효종의 구명운동 덕분에 겨우 목숨만은 부지하지만 백마산성에 구금됐다 영구히 재임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년 만에 석방된다. 우암은 “경인년의 일(백마산성에 구금된 일)이 아니면 개도 그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모욕적인 말도 서슴치 않았다.

 

■ “올빼미는 봉황과 성품이 달라서…” 우암에 직격탄

서계는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며 우암을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백헌의 신도비문에서 “나라를 위해 그 집안을 잊었고 임금을 위해 그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결코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노성한 사람(老成人)은 업신여기지 말라 하였으니 노성한 사람의 중요함은 이와 같다… 감히 상서롭지 못한 자가 되는 것에는 역시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보복이 있을 것이니 이는 하늘의 도리다. 가히 두렵지 아니하랴” 그리고 마침내 직격탄을 날린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품이 달라서 이에 노하고 이에 성내네. 착하지 않는 자는 미워할 뿐 군자가 어찌 염려하리오”(西溪全書) 이는 우암을 올빼미에 견주고 백헌을 군자와 봉황에 비유한 것이다. 

서계유거 : 박세당이 낙향해 조용히 지내겠다는 뜻을 돌에 새긴 것.
서계유거 : 박세당이 낙향해 조용히 지내겠다는 뜻을 돌에 새긴 것.
노론은 서계가 우암을 우롱했다고 분노했다. 이로 인해 논어, 맹자 등 사서삼경에 대한 주자의 주석이 곳곳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사변록>은 결국 이단서로 규정되고 말았다. 시대 조류에 타협하지 않았던 서계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이 찍혀 유배형에 처해 진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출 불가 상소를 올려 장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가는 도중 장독으로 노량진에서 죽은 아들 박태보의 충절 때문에 충신의 아버지를 유배 보낼 수 없다하여 유배만은 면한다. 이경석의 신도비는 죽은 지 84년이 지난 영조 30년(1754)에서야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워지게 된다. 삼전도비문을 지었다는 이유로 죽은 후에도 핍박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 아홉 길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

서계 박세당의 정치적 행위와 사상 속에는 청나라, 도통론과 사공(事功), 명분과 실리, 절의와 화의, 책임윤리와 신념윤리, 역사인식 등의 문제들에 대한 고민과 질문들이 내장되어 있다. 서계는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거냐고 묻는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절의가 중요한가 화의가 중요한가. 국가경영에 있어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차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 원칙(經)이 중요한가 아니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시의적절한 우회전략(權道)이 필요한가. 명분과 힘이 충돌할 때 명분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면서 실리를 택할 것인가. 국가의 이익과 의리가 충돌할 때 국가와 백성을 위해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가. 국가적인 난제와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는데 위정자들의 책임윤리가 중요한가 아니면 개인의 신념윤리를 더 앞세워야 하는가.

 

서계가 궤산정에 올라 “아홉 길 산을 쌓는데 흙 한 삼태기가 모자라”(書經 여오편) 그간 쌓은 공이 모두 허사가 되는 일이 없도록 지금 여기 내 땅을 호미질로 일궈라 ! 라고 외치는 듯하다.

석천동 : 석천은 ‘돌샘’이란 뜻으로 박세당 자신이 은거한 마을을 이렇게 이름 지었음.
석천동 : 석천은 ‘돌샘’이란 뜻으로 박세당 자신이 은거한 마을을 이렇게 이름 지었음.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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