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새천년, 유라시아에서 길을 찾다] ‘한민족 DNA’ 지킨 고려인… 유라시아 대륙 진출의 인도자

1920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한창걸부대
1920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한창걸부대
새콤달콤 시원한 육수에 말아내 토마토와 계란 지단, 고수를 고명으로 얹은 국수. 처음으로 맛본 고려인의 음식은 ‘국시’였다. 탐사단원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쉽게 느낄 정도로 맛이 기가 막혔다. 

이때 김상헌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경기도 안산에 있는 고려인 마을에 가면 국시를 먹을 수 있다”며 단원들의 아쉬움을 달랬다. 

단편적인 예이지만, 그토록 가까운 곳에 고려인 3만여 명이 모여 사는데도 도민은 물론 많은 국민이 고려인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중앙아시아 국가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을 만나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고,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본다. 

■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고유문화 지켜내

올해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을 맞아 각종 매체에서 고려인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고려인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벨라루스 등에 사는 한인 교포를 뜻한다. 한인들은 1850년부터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옮겨가 살았다. 

이후 러시아의 스탈린이 계획경제를 시작한 가운데, 1920~1930년대 한인들은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며 언론, 문화시설, 교육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의 갈등이 발생한 1937년, 소련은 삶의 터전을 닦아놓은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고려인 4만 명이 숨지는 등 고려인은 먼 타지에서 혹독한 삶을 보냈다.

'자이언트 집단농장'의 농업연구원이 수로를 점검하는 모습
'자이언트 집단농장'의 농업연구원이 수로를 점검하는 모습

역경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주목받는 소수민족으로 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먼 타지에서도 한국어와 고유문화를 지켜왔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한인종합예술극장인 고려극장, 고려일보로 이어진 한글신문 레닌기치, 음식문화 등이 예다.

 

레닌기치를 발굴해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진행했던 김상헌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가 “우리 고유의 문화가 한국보다 카자흐스탄 고려인 문화에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설명할 정도다.

 

■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의 위상 눈부셔

카자흐스탄 곳곳에서 전자제품 매장인 ‘테크노돔’이 눈에 띄었다. 매장 안에는 삼성과 LG를 비롯한 한국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이 진열돼 있었다.

 

테크노돔은 중국 전자제품이 주를 이루던 카자흐스탄 시장에 한국 제품을 비롯한 질 좋은 제품을 공급하며 카자흐스탄 최고의 유통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 테크노돔을 이끄는 대표가 바로 고려인 김 에두아르트(김 에드워드)다.

 

국내에서는 고려인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시선이 다수이지만,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의 위상은 높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교육열과 성실함을 보여줬고, 인정받았다. 부지런하고 믿음을 준다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현재 정계, 재계, 학계 등 여러 분야를 이끌고 있다.

1979년 노동절 기념행사 하는 고려인들
1979년 노동절 기념행사 하는 고려인들

카자흐스탄 포브스가 지난 5월10일 카자흐스탄의 부자 상위 50위를 발표했다. 이중 고려인은 역대 최대 수인 7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김 에두아르트 테크노돔 대표의 경우 27위를 차지했고, 1위는 김 블라디미르, 21위 김 비아체슬라프 Kaspi은행 회장, 31위 박유리 Lancaster Group 이사, 33위 김 블라디슬라프 Kazmineral 대주주, 36위 강 세르게이 CAPEC 이사, 43위 츠하이 야코프 Temirzhol energo 대주주 등이 순위에 들었다.

 

정계 진출 또한 눈부시다. 채유리 전 상원의원, 김 게오르기 상원의원, 김 비올례타 전 대법관 등을 꼽을 수 있다.

 

알마티에 있는 카자흐스탄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이런 고려인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2층 소수민족 전시관에서는 고려인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의상, 음식, 혼인, 악기 등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며 옛날 기록물까지 세세하게 전시해놓았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 수가 10만여 명으로 전체 인구 중 0.6%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고려인의 이동 경로
고려인의 이동 경로
■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단어 몇 개에도 애정담아

탐사단은 지난달 15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질료니 바자르를 찾았다. 질료니 바자르는 알마티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으로 카자흐스탄인의 생활 모습과 다양한 물품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이색적인 곳이다. 

큰 규모의 시장 건물 안에 말린 과일, 생과, 채소, 소·돼지·닭·오리·말고기 등 판매 구역이 나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품목에 따라 판매하는 민족이 다른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곳에서 고려인은 반찬을, 러시아계는 정육을, 이란계는 견과류를 주로 취급하고 있다.

 

이 낯선 광경을 보던 중, 한국의 재래시장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찬을 파는 고려인 아주머니들이다. 그들이 펼쳐놓은 좌판에는 새콤달콤하게 무친 당근 절임, 고사리 무침 등 한국과 비슷한 반찬과 김밥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만난 고려인 상인 말리나씨(65)는 “부모님은 연해주에서 왔고 한국에 가 본 적도 없지만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안다”며 “부모님께 한국식 반찬을 만드는 법을 배워 20년간 판매하고 있는데 한국인 방문객이 오면 특히 더 반갑다”고 말했다.

 

시장을 나와 공원을 지나던 중 또 다른 고려인 김 릴랴 알렉산드로브나씨(70)와 만나 대화를 나눴다. 한국 이름은 김순실, 친아버지가 함경북도 청진의 시당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탐사단의 고된 여정을 묻고 걱정하며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넸다.

 

말리나씨와 김순실씨처럼 카자흐스탄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고려인은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고려인 청년들은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익히지는 못하지만,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거나 따로 배우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수교가 이뤄지고 한국 대사관이 자리 잡은 후 한국 정부가 고려인 청년들의 한국어 교육을 지원하는 것도 한몫 하고 있다.

 

(좌)황무지를 개간하고 쌀 생산 등을 비약적으로 증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구소련 정부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노동영웅' 훈장을 받은 김병화(1905~1974). 그가 일했던 농장은 원래 '북극성 집단농장'이었으나 1974년 그가 죽은 후 그의 업적을 기려 '김병화 집단농장'으로 변경됐다.(중)카자흐스탄 국립체육대학 시절의 넬리 김. 넬리 김은 고려인 소비에트 연방 체조선수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각각 획득해, 한 때 '체조요정'으로 불렸던 인물이다.(우)  카자흐스탄 고려인 가운데 대표적 개척자로 평가 받는 김만삼의 초상화. 그는 카자흐스탄 집단농장에서 1942년 벼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구소련 정부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좌)황무지를 개간하고 쌀 생산 등을 비약적으로 증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구소련 정부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노동영웅' 훈장을 받은 김병화(1905~1974). 그가 일했던 농장은 원래 '북극성 집단농장'이었으나 1974년 그가 죽은 후 그의 업적을 기려 '김병화 집단농장'으로 변경됐다.(중)카자흐스탄 국립체육대학 시절의 넬리 김. 넬리 김은 고려인 소비에트 연방 체조선수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각각 획득해, 한 때 '체조요정'으로 불렸던 인물이다.(우) 카자흐스탄 고려인 가운데 대표적 개척자로 평가 받는 김만삼의 초상화. 그는 카자흐스탄 집단농장에서 1942년 벼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구소련 정부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 국가마다 다른 상황의 고려인, 통일 한국 대비해 면밀히 분석해야

고려인과 협력해야 한다는 말은 한국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다. 매번 이슈가 되지만 진전이 없어 이제는 고려인 사회에서 ‘못 믿겠다’고 할 정도다.

 

문제는 고려인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김상철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고려인을 바라보는 한국의 현재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과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은 처한 상황이 다름에도 중앙아시아로 묶어 생각하고, 도움을 줘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국가 간 문제를 차치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하는 것 등이다. 모든 고려인이 카자흐스탄 사례처럼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성급한 일반화는 자칫 고려인과의 관계 형성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인 사회는 소련이 붕괴된 후 25년이 지난 지금, 국가와 지역 단위로 특성이 분화됐다. 김 교수는 앞으로 고려인 사회의 특성을 명확히 파악하고 이를 접근 방식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기준으로 고려인을 생각하지 말고 고려인의 기준으로 한국을 생각해야 한다”며 “고려인은 이미 국제화돼 한국보다 다민족, 다자사회에 익숙하다”고 강조했다.

 

고려인에 대해 김 교수는 한 가지 더 조언했다. 고려인이 향후 남북한 관계를 조율할 수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고려인은 함경도와 평안도 방언을 사용한다. 현재는 남한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지만, 조상과 정서를 살펴보면 북한이 그 뿌리다. 특히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체제 전환을 겪었던 만큼 통일 한국에서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통일 시대에 갈등을 풀 수 있는 중간자로서의 고려인과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달 15일 방문한 카자흐스탄 알마티 질료니 바자르에서 고려인 말리나씨가 판매하는 반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달 15일 방문한 카자흐스탄 알마티 질료니 바자르에서 고려인 말리나씨가 판매하는 반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손의연기자

사진=연합뉴스·신춘호 유라시아 열차 탐사단

후원: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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