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고속철 굴기’에 올라탄 러시아… 심기 불편한 미국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전 부문에 걸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은 새로운 방식의 국가 발전을 꾀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만 하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이 같은 처지는 일대일로에 포함된 세계 각국의 고민과 대동소이하다. 신실크로드 구축에 있어 러시아의 판단과 향후 결과를 면밀히 검토하며 우리나라의 대처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 깊어지는 중·러 관계… 그러나 웃을 수 없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5월15일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을 지지하며 이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원탁회의 연설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제안한 일대일로 구상에 대해 “현대적 발전 경향과 궤를 같이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며 “러시아는 이 프로젝트를 지지할 뿐 아니라 중국을 비롯해 다른 국가들과 함께 프로젝트 이행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시아와 유럽 간 경제발전과 상호 유익한 통상을 위한 지대를 창설한다는 구상은 시의적절하고 중요한 제안”이라며 “이 구상은 세계 경제의 최신 경향을 고려하고 유라시아 대륙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통합 과정 조율 필요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앞서 시 주석은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시 주석은 당시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역사상 최고로 좋다”고 밝혔으며, 이 평가를 현지 언론 등이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중국 관영매체도 시 주석이 러시아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외신 보도 등에 따르면 중국 상무부는 지난달 29일 중국의 일대일로, 유라시아경제연합(EEU) 사이의 연계 실현 가능성을 연구하는 데 대해 합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지난 2015년 양국은 두 경제 전략의 연계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으며, 이후 중국과 러시아 간 교역량은 지난 5개월간 2천231억 위안(약 37조 7천128억 원)에 달할 정도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러시아는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중국의 구상이 진척될수록 정치와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러시아의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조너선 힐먼 연구원은 일대일로와 EEU 간 연계의 실현 가능성 연구는 중·러 관계의 큰 진전이 아니라 연계에 대한 관심의 표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또 러시아는 중국의 과잉 공급을 고려할 때 매력적인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중국이 EEU에 가입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이 일대일로 구상이 구체화하면 러시아의 경계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은 경제 분야, 러시아는 정치·외교 분야에서 각각 우월한 지위를 구축한 상태지만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특성상 해당 국가의 정치·외교 사안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 러시아의 입지가 좁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는 자국 동쪽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을 우려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블라디보스토크 등 러시아 동부권역은 과거 중국이 지배한 역사가 있어 중국인들이 땅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는 분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일 미 상하원을 통과한 러시아·이란·북한 통합 제재법에 서명했다. 법안에는 미국이 자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러시아 기업의 사업 제한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같은 미국의 결정으로 미국과 러시아, 유럽연합(EU) 사이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독일상공회의소(DIHK)의 폴코 트라이어 부사장은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 강화는 미국 경제 증진을 위한 조처로 독일 경제를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자신들 경제 이익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유럽 집행위원회(EC)의 보복 조처 검토는 국제법 위반이 의심되는 국외 제재에 대응하기 위한 타당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러시아 기업의 유럽 활동 규제를 강화하면 독일 기업이 러시아와 공동 사업을 할 길이 막히면서 “중요한 에너지 안보 사업이 보류될 수도 있다”며 “이 경우 독일 경제 전반에 고통스러운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EU 지도부도 미국의 대러 제재 움직임에 우려를 표명했다.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은 “미국이 새 제재를 이행한다면 우리도 며칠 안에 충분한 대응을 취하겠다고 한 바 있다”며 “미국에 맞서 우리의 경제 이익을 방어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특히 EU 회원국 중 독일은 미국의 이번 조처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노드 스트림 2’ 천연 가스관 사업에 자국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미국의 제재에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는 “미국이 러시아에 전면적인 무역 전쟁을 선포했다”며 “새 미국 행정부와 관계 개선을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은 미국의 대러 제재 처리에 반색하는 모양새다. 미국의 러시아 제재가 강해질수록 중국이 러시아와의 무역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본다는 게 중국 통상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특히 펑위쥔(馮玉君)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 러시아연구소 연구원은 “중국은 일대일로의 틀 안에서 러시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면서 “인프라 개발에 대한 투자를 가속할 것이다”고 전망했다.
중국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대일로’ 구상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러시아 제재 강화로 중국이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기회를 많이 얻게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이런 기회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중국이 대러시아 무역 구조를 개선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민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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