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갑질이라 하면, 권력을 가져 완장을 찬 사람들의 나쁜 행태를 일컫는 말이었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 허가권을 가진 공무원, 인사권을 가진 기업주처럼 말이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증인을 불러놓고 차분하게 질의를 하기는커녕 망신주기와 군기 잡기에 치중하는 행태를 갑질이라 했고, 법적 요건을 갖춰 내줘도 되는 허가를 질질 끌면서 밥이라도 한번 대접받고자 했던 공무원도 갑질이라 했으며,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나 운전기사에게 반복적으로 욕설을 한 대기업 회장의 경우처럼 인사권을 가졌다고 직원들을 마구 대한 기업주도 갑질 중의 갑질로 여겨왔다.
어쩌면 갑질은 인간 깊은 본성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완장’만 차면 봉사하기보다는 군림하고 싶어하는 게 인간인 모양이다. 학창시절 ‘선도’ 두 글자가 새겨진 완장을 찬 간부들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기합을 주곤 해서 교문 들어서기가 마치 지옥문 들어가기와 같았던 기억이 있다.
6·25때 면장 하시던 외할아버지를 산으로 끌고 가 몸이 상할 정도로 때리고 괴롭혔던 자들도 ‘붉은 완장’을 찬 인민군 부역자들이었다. 윤홍길의 소설 ‘완장’에 등장하는 임종술도 그랬다. 동네 건달 종술이 갑부 최씨의 양어장을 관리하면서 왼팔에 찬 ‘노란색 완장’이 문제였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에게 기합을 주고, 밤중에 몰래 물고기를 잡던 친구와 아들을 때리기도 한다. 완장이 주는 권력을 알게 된 종술은 읍내에 갈 때조차 완장을 차고 활보하면서 갑질을 한다.
언론과 양식 있는 시민들은 완장 찬 권력의 갑질에 분노했고 비판했고 저항했다. 정치인과 공무원을 눈 크게 뜨고 감시하고 각종 규정도 더 세밀하게 만들어서 재량을 줄여나갔다.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권력자들의 갑질이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던가? 어느 사이 우리 사회에서는 권력자의 갑질이 일상화 내지 일반화되고 있다. 딱히 권력을 갖고 완장을 차지 않은 일반시민들 사이에도 심심찮게 갑질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강서구 특수학교의 경우가 바로 시민들 사이 갑질의 일상화가 아닌가 싶다. 콜센터에 전화해서 아무 죄 없는 콜센터 직원에게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백화점 여종업원을 무릎 꿇린 손님도 있었다. 마을에 조금 큰 공장이라도 들어가면 발전기금을 내라고 성화다. 사회 전반에 걸쳐 약자에게 강요하는 부당함의 정도가 상식을 넘어섰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고 있다. 시민들 간 갑질의 폐해가 고스란히 다른 시민들에게 돌아가고, 단순한 경제적 불이익을 넘어 인격 모독의 형태로까지 커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오죽하면, ‘갑질 빠개기’라는 시민단체 사이트까지 생겨났을까?
어른들 사이에서 일상화된 갑질은 아이들에게 전염되고 있다. 학교폭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 내부의 갑질과 아주 비슷하다. 어른들의 갑질을 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거다.
대한민국 공동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권력자의 갑질을 욕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운 갑질이 사회 전체에 일상화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인한 외부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된 대한민국이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는 사회 내부로부터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수영 아주대 초빙교수 / 前 경기도 행정1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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