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강력한 지방분권… 통일 후 갈등 완충 역할
앞서 문 대통령은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잘사는 강력한 지방분권 공화국을 국정목표로 삼았다. 연방제에 버금가는 지방분권제를 만들기 위해 지방분권 개헌을 추진할 것”이라며 분권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대다수의 통일 전문가들은 현 정부의 이러한 개헌 구상을 향후 통일 한국을 염두에 둔 ‘대비’로 바라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통일이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상황변화에 따라 예기치 못하게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통일 이후 빠른 체제 안정과 사회갈등 완화를 위해 지방분권형 국가 체제를 남한에서 미리 정착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남과 북’ 이질적인 두 사회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보다는 각 지역의 정체성이 자리잡힌 작은 단위의 사회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 통일 이후 갈등을 풀어나가는 데 훨씬 수월하다는 이유에서다.
본보는 전통적 분권 국가인 독일의 통일 사례를 통해 지방분권 국가체제가 통일 이후 사회 안정화 등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향후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지방분권의 방향을 제시해본다. 편집자주
대표적 통일 국가인 독일은 우리나라와 역사적, 문화적으로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독일의 강한 지방분권 시스템과 통일을 이뤄낸 경험은 지방분권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때문에 독일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통일을 이뤄냈고 지방분권형 국가 체제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 과정을 세밀하게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짚어보고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방분권 개헌 움직임을 통일적 관점에서 접근해본다.
■ 독일 통일 어떻게 이뤄졌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소련 등 연합국에 패배한 독일은 승전국들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이후 1949년 서독(독일연방공화국)과 동독(독일민주공화국)에 각각 독립된 정부가 수립되면서 분단이 공식화됐다.
1950년대 초에는 한때 중립 통일안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60년대부터는 서독의 할슈타인원칙(대동독 강경책으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옛 서독의 외교상 원칙)에 따라 대결 국면이 조성됐으며 1961년에는 분단 독일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이후 국제적 냉전체제 속에서 대립을 이어오던 동ㆍ서독은 1969년 서독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하면서 전환기를 맞았다. 동방정책은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외교정책을 말한다.
서독은 동독을 정식국가로 승인한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갖지 않기로 한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루마니아ㆍ유고슬라비아와 국교를 회복하는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 동ㆍ서독 기본조약 조인을 비롯, 독ㆍ소 불가침조약 체결, 폴란드와의 국교 수립 등이 이뤄졌다. 이러한 서독의 태도 변화 속에서 1970년 3월 동독의 에르푸르트, 5월 서독의 카셀에서 잇달아 동ㆍ서독 정상회담이 열렸다.
마침내 양국은 1971년 11월18일 10개 항으로 구성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후 1972년대부터 1987년까지 약 15년간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 기술, 문화, 환경 등에 관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동ㆍ서독간 민간인의 교류가 이뤄졌다.
당시 서독에서 동독지역으로 걸린 전화통화는 1989년 통일되기 전까지 약 5천만 회에 달했으며 2억 2천만 통의 편지와 3천900만 개의 소포가 상호교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문자 수 역시 1980년 급격히 증가해 매년 1천만 명에 달했다. 청소년 교류의 경우 분단고착화를 방지하는데 큰 의미를 가졌는데 매년 8만5천여 명이 상대 지역을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특히 도시간 자매결연도 활발히 추진됐다. 통일이 이뤄지기까지 62개 도시가 자매결연에 참여했으며 언론ㆍ문화ㆍ체육인들의 교류 역시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1982년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서독 총리의 동독 방문과 1987년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동독 공산당서기장의 서독 방문 등을 통해 통일에 일대 전기가 마련됐다.
이런 가운데 구소련 공산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ov)가 개혁정책(Perestroyka)을 추진, 소련 국내의 개혁과 개방뿐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다.
고르바초프 개혁정책의 영향으로 동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눈치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추진하게 됐고 동독도 같은 행보를 걷게 되면서 1989년 11월9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철거됐다. 이후 1990년 3월 동독 최초 자유총선거가 실시된 데 이어 5월 동ㆍ서독이 화폐와 경제, 사회통합에 관한 국가조약에 서명하는 등 통일 분위기가 고조됐다.
같은 달 독일에 대한 국제적 지위와 영토 군사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ㆍ서독과 미ㆍ영ㆍ프ㆍ소 4개국이 참여하는 2+4 회담이 열렸고 4차례에 걸친 회담 끝에 9월 모스크바 제4차회담에서 ‘통독관련 최종 합의에 관한 조약’이 성사됐다.
이후 1990년10월3일 동독인민의회가 서독에 동독을 편입하기로 결의하면서 정식적인 독일 통일을 이뤄냈다.
■ 새국면 맞은 한반도, 통일 구상 담긴 지방분권 개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 참여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선언 13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참여정부가 추진해 온 지방분권과 균형발전 정책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연방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지방분권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또 지난 6월 열린 시도지사간담회에서도 “내년 개헌 때 헌법에 지방분권을 강화하는 조항들과 함께 제2국무회의를 신설할 수 있는 합법적인 근거를 마련하려고 한다”며 분권 의지를 재차 피력한 바 있다.
이처럼 문 대통령이 ‘지방분권형 개헌 추진’ 의사를 밝힌 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선 제왕적 대통령제 권력구조를 타파하고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했다는 의미가 있다.
또 다른 한 측면은 지방분권공화국과 연방제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향후 통일 한반도를 대비한 준비 차원의 개헌이라는 해석이다. 지방자치 강화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서 비롯된 한반도 통일구상이다.
통일 전문가들은 현 정부의 지방분권 개헌 구상이 미래를 내다보고 통일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접근,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통일을 염두한 새 국가의 틀을 남한에서 미리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독일 통일의 경우 역시 강력한 지방분권적 국가 체제가 통일 전후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영옥 박사(경기대 명예교수ㆍ국가보훈학회 회장)는 “남북한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래 70여 년간 서로 다른 정치이념과 체제의 틀 속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겪으며 대치상태를 이뤄왔다”며 “현 정부의 지방분권 개헌 과정을 통해 우리가 ‘지방분권화’를 제대로 정착시킨다면 향후 도래할 남북통일에서 갈등 완화 등의 시너지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준상기자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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